나기철 시집 '담록빛 물방울'의 시(8)
♧ 먼 곳
-이시영 풍
국장으로 퇴임한 시인이 성산일출봉이 훤히 보이는 집 앞 공터에서 포장을 몇 개 치고 단상도 만들어 시집 출판기념회를 하는데, 끝나 몇 해 전 김 약사네 집 밖에 와 사는 팔순 넘은 이제하 시인이 나중 추첨자의 하나로 나가 몇 번 손을 넣었다. 허름한 모자에 편한 옷을 걸친 그가 아무 말 없이 돌아와 아픈 듯 아픈 듯 사람들 틈에 앉아 다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 평화양로원 3
사람 하나 안 보이던
건물 밖
정문 쪽에
할머니 둘 나와 있다
“어르신들, 빨리 들어가세요!
다칠 수 있어요”
“세 살 난 어린앤가,
괜찮아, 괜찮아”
다시
고요해진
♧ 노래할 곳
엘싱타사르헤 초원
겔에서 짐을 풀고
저녁을 먹고
빠져 나와
초원의 멀리까지
가서
힘껏 노래를 불렀다
말들이
드문드문
한참 후
한 사내가 말을 타고 와
검지로 입을 막고
돌아갔다
♧ 임파선
태풍 타샤는
어디로
가 버렸나 부다
주말 이틀 내내
머리채 잡고
울리더니
오늘은
누군가
따스한 입김으로
달래 주신다
갑자기 솟아오른
팔뚝의 붓기도
많이 가라앉았다
♧ 늙은 병사의 말
-양동윤
이윽고 잠잠해진 구제주
버스 정류장 앞에서 만났다.
폐암 와 1년 선고 받았는데
살아났어. 이제 갈 순 없어서.
이 나이에도 도민연대 매일 나가고
4・3 못 그만두는 건 솔직히 나처럼
할 후배 없어서. 글 쓰는 이들이 현
장에 안 와. 20년 전 머무르고 있고.
50년 전 심지다방 판돌이,
30년 전 한결같은 얼굴.
이제 성자 같다.
*나기철 시집 『담록빛 물방울』 (서정시학, 2023)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애기동백(흰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