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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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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성 시집 '이어도공화국 5, 우리들의 고향'(1)

by 김창집1 2023. 9. 28.

 

 

시인의 말

 

 

고향집 바로 앞에

언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다

나는 연어가 되어

참으로 먼 길을 거슬러 돌아왔다

나도 이제 너를 만나

붉은 알을 낳아야만 한다

 

 

                                     2023년 봄여름

                   언어의 종착역에서 배진성

 

 

 

 

경운기

 

 

들판에서는 늘 보리타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미소 주인이셨던 아버지가

벨트에 물려 끌려가던 날부터 축이 헛도는

천장에서 다시 떨어지듯 우리 식구들은

빈 들판으로 내쫓겼다 발동기 같은 큰 형은

발동기를 뜯어 짊어지고 논둑길을 넘어 다녔다

타맥기도, 부러진 아버지 갈비뼈처럼 풀어

옮겨 맞추곤 했다 경운기들이

손쉽게 해치우고 들어가 쉬는 동안에도 우리는

들판에서 밤늦도록 이슬에 젖어야 했다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카바이드를 녹이는 물처럼

우리식구들의 가슴은 애타게 들끓었다

불이 꺼진 뒤에도

카바이드 깡통 속에는 몸살 나게 아름다운

사랑이 숨 쉬고 있었다 비오는 날이면

보리 한 됫박 퍼내어 바꿔온 복숭아를,

보리 창고에서 나눠먹곤 했다 큰 형 몸에서는

늘 기름 냄새가 났고 바뀐 논에 말뚝을 박을 때마다

우리 들판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함부로

골병들어, 거덜 난 보릿대를 곁에 쌓는 작은 형

보리무덤에 검불을 쓸어내는 누이는

갈퀴와 고무래처럼 한없이 슬픔을 후볐다

가마니 한 장 크기의 그늘 속에서 조용히

기어 다니다 잠들곤 하던 나는 자연 숙제로 기르던

거꾸로 매달린 형의 무

그 속에서 싹트는 콩 거꾸로

자라던 허약한 순만 바라보며 그렇게 자랐다

그리고 많은 날들 다음으로 오는 오늘

털털털 탈탈탈 털털털털털 탈탈탈탈탈

들판을 온통 뒤집어엎어 버리던 경운기가

골목마다 들쑤신다

추곡수매 공판날 줄서가는 아침

하곡수매처럼 저 멀리 노인들이 손수레 밀고

끌고 오신다 빈 들판에 바람이 껍질을 벗고

지나간다 그 길가로 바람의 껍질이 차갑게 쌓여

있다 월경리 사람들의 깊은 사랑을 실어 나르는

경운기는 힘 센 들짐승이다 그러한 아침

나는 다른 계절 속으로 떠나 눈길에 경운기

발자국을 만들며 고향으로 가는 길을 걸어서 간다

 

 

 

 

시인의 월급은 얼마나 된다냐

     -어머니, 시인은 월급이 없어요

 

 

  참으로 오랜만에 들길을 간다

  두엄자리 곁에 세워진 아버지의

  낡은 지게를 지고 저물녘을 간다

  참깨 베러 가신 어머니의 산밭으로

  늦은 마중을 간다 오랜만에

  바람을 비껴 여름 한쪽 끝으로

  산길을 오른다

  노을이 차마 곱게 익는다

 

  일찍부터 외항선을 탄 만수

  뱃사람이 된 만수 네가 새로 장만한

  논을 바라보며 들길을 간다

  일곱 번씩이나 떨어지고도 다시

  행정고시공부를 시작했다는 현길이

  이미 기울어 버린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팔아넘긴 논배미를 지나

  쓸쓸하게 걸어간다 새를 쫓는 깡통소리와

  반짝이는 반짝이의 마음들이 노을 속으로

  새를 날려 보내며 또 내일을 염려하는 가슴을

  가다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허수아비는

  쓰러지지 않고 동그랗게 질린 비닐 얼굴들이

  하늘까지 닿으려는 마음으로 솟아오르곤 했다

 

  콩밭으로 바람이 기어들어 가고 밤은

  들쥐처럼 숨어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와 산길을 내려온다 가끔

  고개 치켜드는 벼 포기 사이로 추억들이

  발소리를 숨죽이며 기어 나왔다 나는 참깨를 지고

  어머니는 토란대를 이고 오셨다 가슴 조인

  달빛이 풀어지고 우리는 하염없이 걸어 내려온다

 

- 어머니, 저 이제 시인이 되었어요

- 그래, 시인이 뭣 허는 것이다냐

- , 지금까지 제가 되고 싶었던 것이에요

   밤낮을 밤으로만 지내면서 말이에요

- 그러냐, 그럼 이제 취직이 됐단 말이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것이 아니에요

- 그럼, 시인이 뭣 하는 것인디 그러냐

   오랜만에 니가 웃기까지 하고 말이여

- , 앞으로

   우리들의 고향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노래? 그럼 인쟈 테레비에도 나온다냐

-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에요

- 그라믄, 시인 한 달 월급이 얼마나 된다냐

  먹고살 만한 직업이다냐

  요즘 시상에는 돈이 최고드라

  봐라, 만수는 돈 있승께 다들 걱정허는

  장개도 쉽게 간다드라

  돈 많은 이쁜 색시가 낼모레 온다드라

- 어머니, 하지만 저는 그렇지를 못해요

  앞으로 어머니를 팔지도 몰라요

  앞으로 고향을 팔아먹을지도 몰라요

  시인은 가난한 직업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요

  마음을 갈고 닦아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더욱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우리들의 이야기가 들판 가득 출렁일 때 달빛은 우리가 걸어온 들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머니와 고향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팔아먹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땅의 눈물 같은 시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배진성 시집 이어도 공화국 5, 우리들의 고향(시산맥,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