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038 계간 '제주작가' 2026년 여름호의 시(4) ♧ 떠오르길 - 홍경희 -김녕 ‧ 1 바다는 번번이 지우려 달려들었고파도가 잠시 물러서는 간조의 틈마다해녀들은 끝내 길 하나를 얹었다 검은 빌레의 마른 등뼈 위맨발의 통증이 눌어붙고바다는 겨우 건널 수 있는 문장이 되었다 누군가는 묻는다.‘떠오르는 길’이 아니라왜 '떠오르길'이냐고 파도는 자꾸 문장의 어미를 지웠고바다는 늘 몇 마디씩젖은 채 남겨두었으나 해녀들은 그 비어 있는 자리를제 생으로도 메우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어미 한 사람,끝내 돌아오지 못한 이름 하나쯤물 아래 닫히지 않는 서랍 속에 넣어둔 채평생을 서성이는 ‘는' 하나쯤 사라진 이름은오히려 더 오래 출렁인다 떠오르길간조를 따라현무암 사이 잠겨 있던 길이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끼처럼 번진 파래는바다가 미처 거두지 못한 얇은 체온.. 2026. 8. 28. 고영숙 시집 '꿈을 나눠 먹어요'의 시(6) ♧ 태(胎) 여러 달 동안그믐달 테두리에 서 있어시무룩해진 살점 조각문양이 벗겨진 채 나는생멸 주기를 감지하는 검은 거울이야엄마는 나를 배고 생쌀만 씹었다는데씹고 씹어서 생생해진 꿈은무덤까지 가져갈 수 없다는데움켜쥔 주먹 속으로 숨어드는 손금여기서부터 해몽이라고웅크린 작은 것이 툭, 떨어지는데반은 투명하고 반은 어두워그늘진 운명 앞에 놓여도 당신이어서허기처럼 잘도자랐는데다행이다내 입가에 묻은 게 흰 쌀가루여서 ♧ 출몰 애당초 저 달을 만지는 게 아니었다 만곡선을 그려 달을 가둔다다 그리지 못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새를 울린다새의 눈물이 빈 병에 차오른다 달의 기울기를 재는 이 남자금이 간 풍경 속에서 통증이 새어 나온다 투명한 지층 저편의 창문을 두드리는 고요 만지고, 그려 넣고, 각도를 재고, 금이 .. 2026. 8. 27. 김원욱 시집 '누가 저 푸른 창을 깨트릴까'의 시(1) ♧ 시인의 말 이 시집의 공간은 대부분 경계 위에 놓여 있다. 그곳은 흔들리는 통로이며, 잠시 머무는 투명한 균열이다. 공백의 가장자리를 더듬으며 침묵을 붙잡고자 했다. 남아 있는 것과 사라지는 것의 경계, 문장은 계속 미끄러졌다. '사라진 것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2026년 여름 김 원 욱 ♧ 원담 꽃밭에 앉아돌담을 쌓다가 깊은 공중인드라망에 갇힌 생채기를 걷어 올렸다 파닥거리는, 그곳에도 불이 있을까제단이 있을까 문득돌아보.. 2026. 8. 26. 김경희 시집 '꽃은 꽃으로 답한다'의 시(2) ♧ 기억 하나 단발머리 중학 시절 해가 좋던 여름날세숫대야 꺼내 들고아껴 입는 청바지의 흙 묻은 바짓단을콧노래로 주물러 담벼락에 쫙 펼쳐놓고는 아침 등굣길급히 걷어쑤욱 끌어 올려 입으려니허벅지 안쪽에 어째 불편한 이물감 바둥바둥 스르르살갗을 긁어대는 어마무시한 공포자동 발사되는 하이톤의 절규 훌러덩 벗어 던진 바지 안쪽엔어리둥절 비틀대는 풍뎅이 한 마리 ♧ 기억 둘 난 도도한 시골 소녀사뿐사뿐 뛰어넘는 고무줄놀이더 높이 더 높이 점프 점프 헉! 신발을 찾아 신는 조그만 두 눈엔낯익은 통통한 맨발바닥너울너울 잘도 닳아버린줄무늬 새 양말의 하얀 밑창 울먹울먹 돌아온 집 앞물꼬 튼 듯 터지는 우레같은 소리 엄마아아앙! ♧ 고향 꿈을 꾸었다차를 몰고 천천히 왼쪽으로 커브를 돌았다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앞서기는.. 2026. 8. 25. 이애자 시집 '섬에선 모든 길들이 바다의 목줄이다'(2) ♧ 섬의 시간들2 -벌초 붉은 녹물을 토해낸 호미의 날끝과 할아버지 손끝에서 단숨에 베어진 풀들, 휘갈긴 획 하나 하나가 풀물보다 먹물입니다 ♧ 두루마리 휴지 나무는 죽어서도 모든 장기를 내어놓는다 견딤의 흔적마저 두루 말아 표백해 버린 저 하얀 나이테에는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 ♧ 제주 사람 부러, 바람 앞에 틈을 내준 밭담들 보라 어글락 다글락 불안한 열 맞춤에도 쉽사리 허물어지지 않는 엇각을 지니고 있다 ♧ 고드름 초특가세일처럼눈이 밤새 쌓이고 체감 온도 영하설 무렵 내 주머니 속 뽀드득겨울을 씹는송곳니가시리다 ♧ 흑단나무 혼수로 마련해 온 굴무기 궤 결을 보다 인고의 세월 견딜 시집살이에 추신하나 힘들 때 잠깐 쉬라고 검정 뭉게구름 딸려 보낸다 ♧ 나도 꽃이다 풀에 묻혀 풀처럼풀과 .. 2026. 8. 24. '혜향문학' 2026 상반기호의 시(3) ♧ 연지 - 김철선 청옥벼루작은 호수에묵향안개 살포시 솟아나면세월 저편왕조의 숨결애틋한 그리움 숨어 있네화선지에 묵향 띄워 붓 놀리면설매雪梅의 고요봄…, 부르고난은 봉안 잎 흔들며가인의 향으로 내게 온다 푸른 연지에뒤돌아 역사가 다가서고꽃향기 피어나니방촌묵수方寸墨水*야너는 정녕 뉘인가? ---*사방 한치에 고여 있는 먹물. ♧ 봄비 – 박은교 긴 얼음 잠 깨우려는 듯톡 톡톡 노크하듯초록의 잎사귀봄비에 흔들리며소복이 젖어들고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에겨우내 잠들었던 모든 생명들서서히 기지개를 펴네 비에 젖어 흔들거리던 풀꽃도이내 꽃망울을 터트리며봄꽃으로 피어나고앞마당에 새싹들도 파릇파릇 일어서네 봄비야 봄비야어서 어서 내려이 세상 온 세상봄꽃세상 만들어라 꽃 찾아 날아드는 꿀벌들도 나비들도봄비 내리는 봄 세.. 2026. 8. 23. 이전 1 2 3 4 ··· 17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