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마음의 신화
땅을 뒤집어 산을 깁고
치맛자락 터진 사이로 봉긋봉긋 오름들 피워내어
ᄉᆞ시ᄉᆞ철 꽃피고 새우는
푸른 계절 멘들아시난
오백 아들들 그 자손만대 잘 살라 이르며
물장오리 깊은 물 바닥에 들어
물길 찾아다니느라 못 나오시는데
어느 신생 권력에 밀려 단골들 빼앗겼는지
묻는 이 없고, 역사의 뒤안길에
신화라는 봉분도 없이
전설로나 떠돌아야 하다니
이 지구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신이며
가장 어머니다운 표상이신
설문대할망!
저 바당과 오름들 ᄇᆞ름 따라 ᄀᆞ와근에
내 마음에 품엇수다
♧ 단골
테역밧
촐왓디
벵디길 돌고 돌아
신새벽 산물에
지극 정성 씻는 기도
절치는 바당
절해를 뛰어 내린
뜨거운 믿음이
산신또 바당신또
뒷걸음쳤으리
오래 전부터
춥고 배고픈 이의 힘이던 것처럼
다시
이 땅을 재재 재 살 사람들
어느 신의 계보이다가 단골이다가
천지간 세월 속에
할망 하르방으로 맞으시겠네
♧ 구름떡쑥
는 뜨면 맨 먼저 하는 일
베란다 창문으로 한라산 한 바퀴 둘러보는 일
핸섬보이 한라장구채 삼삼하고
바위에 붙어사는 돌매화 아른거려
산으로 출근한다
임금님 수랏상에 올랐다는 어수리 하얀 꽃다발
자갈색 보드라운 꽃송이로 고개 숙인 수리취
영실 병풍바위 기웃거릴 때
낮게 퍼지는 왕관 모양의 겹잎 두른 구름떡쑥,
널 본 지 몇 해던가
윗세오름 방애오름 남벽 에둘러 북벽 아래 개미목
초연히
구름송이 폴폴 앉히는 꽃 동무 있어
새카맣고 쪼끌락한 서러운 이 지켰느니
이만한 호사도 없겠는데
바다의 물꽃도 꽃물로 달려오는
꽃다운 숲에서
꽃 같은 세상 얻었느니
철따라 자박자박 꽃물결 풀어놓는
한라산!
가장 완벽한 멘토에게 기도를 바치노니
♧ 여름새우란
후두둑 소나기는
대지를 두드려 꽃을 피우고
꽃잎 흔들어
바람의 노래 청량한
신들의 텃밭에서
일흔의 늙은 아이는
백주또 자청비 영등할망 설문대할망
할망들의 구수한 웡이자랑 가락에
헤엄치며 꿈을 꾼다
첫눈에 사로잡힌 도도함이
멋지다 예쁘다 하여
누군가의 마음을 훔쳤는지
보쌈을 당하고
잊혀도 좋을 세월의 그늘 속에서
꽃아!
분홍나비 떼 지어
사뿐사뿐 숲길을 물들여다오
♧ 박주가리
늙은 할망들 신앙 속에서만 사는 줄 알았지
세상의 문밖을 오래 전에 빠져나갔으려니
영악한 21세기엔 얼씬도 못하고
영영 오지 않을 거라 했지
애초에 신화란 황당한 시나리오에 불과하다고
아무거나 잡으면 칭칭 휘감기는 팔뚝 힘에
간뎅이 팅팅 부어 오른 줄을 몰랐지
꽃밭에는 꽃만 있고
먼데는 먼 산만 아련하고
하늘엔 구름만 떠 다녔다네
유유히 떠가는 흰 구름자락에
누군가의 간절함이 까치발 모가지를 늘여도
사는 동안 고르고 밀치고 가둬버린 소소한 것들이
완벽한 히스토리가 되어
먼 산기슭이고 꽃잎 혹은
골목 어디쯤 담벼락 적시며
숨소리 팔락거리고 있었던 것을
다 살고난 이제야 알게 되다니
단단한 씨방이 터지고
가벼이 날아가는 씨앗을 바라보며
나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움에 낯을 붉힌다
*김순남 시집 『내 생애 아름다운 인연』 (도서출판 각 시선 051,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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