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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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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호 시조집 '농막일기'의 시조(3)

by 김창집1 2023. 10. 10.

 

 

그 물맛

 

 

1

한여름 이른 아침 번쇠*를 몰고 간

검은오름 넓은 자락

목이 탈 대로 탈 때면

 

구렁 물

후후 불며 손으로

떠서 먹은

그 물맛

 

 

2

10kg 완전군장軍裝 10km 뛰어갈 때

무게를 덜어야 해

쏟아버린 수통의 물

 

지축을 흔들어대는

군화 발소리

착 착착

 

다다른 동복** 샛강

10분간 휴식 시간

다리를 휘청거리며 다가간 강물 위에

 

손수건 쫙 펼쳐놓고

쭉쭉 빨아먹은

그 물맛

 

---

*방목하기 위해 아침마다 풀어놓는 소들을 일컫는 제주어

**유격장이 있는 곳

 

 

 

 

절물오름 오르다

 

 

길 위로

산뽕나무 오디

톡톡 떨어지는

생이소리길* 걸어가지만

새소리는 들리지 않고

푸른 숲

푸른 바람이

내 등을 밀어주는

 

뒤돌아

볼 틈도 없이

산허릴 감아 도는

데크길 따라 걷다 멈춰선 시선 끝에

만개한

산딸나무 꽃

하얀 양산 펼친 듯

 

계단 위에 계단 있고

계단 밑에 계단 있다

능선을 돌고 돌아 정상의 문을 열자

사방四方

둘러맨 전망대

다락 위에 내가 서다

 

숲은

푸른 바다

오름들 꼬릴 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노를 저어 가다

녹음을

확 둘러쓰고

하나 되는 너와 나

 

---

*새소리가 들린다는 등산로 이름

 

 

 

 

유리창을 닦다

 

 

4월 꽃샘추위도

물러난 환한 대낮

때가 낄 때로 낀 농막의 유리창을

닦는다

하얀 걸레가

새까맣게 타버렸다

 

몇 번을 닦고 닦아도

창문 밖이 흐린 것은

앞만 보면 달려온

부끄러운 삶인 것을

그래도

오늘만이라도

투명하게 닦고 싶다

 

 

 

 

할미꽃

 

 

온갖 꽃 다 판다는 오일장 사철꽃집

 

포토에 졸고 있는 할미꽃을 본 팔순의 김씨

 

쯧쯧쯧

왜 여기에 있어

들에 피어야지

 

 

 

 

벌초

 

 

벌초를 한다는 것은 혈연의 끈 당기는 일

처서와 추석 사이 모인 피붙이들

무성케 자란 풀들을 가차 없이 베어내는

 

쒸이엥 쒸이엥 예초기 소리 멈추자

깔끔하게 다가앉은 솟은 봉분들을

가을빛 산들바람이 비질하며 지나가고

 

향긋한 풀 향기에 촉촉이 젖은 상석床石

술 부어 잔 올리고 엎드려 절을 하면

돌비에 새긴 이름들 나비되어 날아가는

 

 

               *오영호 시조집 농막일기(동학사,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