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물맛
1
한여름 이른 아침 번쇠*를 몰고 간
검은오름 넓은 자락
목이 탈 대로 탈 때면
구렁 물
후후 불며 손으로
떠서 먹은
그 물맛
2
10kg 완전군장軍裝 10km 뛰어갈 때
무게를 덜어야 해
쏟아버린 수통의 물
지축을 흔들어대는
군화 발소리
착 착착
다다른 동복** 샛강
10분간 휴식 시간
다리를 휘청거리며 다가간 강물 위에
손수건 쫙 펼쳐놓고
쭉쭉 빨아먹은
그 물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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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목하기 위해 아침마다 풀어놓는 소들을 일컫는 제주어
**유격장이 있는 곳
♧ 절물오름 오르다
길 위로
산뽕나무 오디
톡톡 떨어지는
생이소리길* 걸어가지만
새소리는 들리지 않고
푸른 숲
푸른 바람이
내 등을 밀어주는
뒤돌아
볼 틈도 없이
산허릴 감아 도는
데크길 따라 걷다 멈춰선 시선 끝에
만개한
산딸나무 꽃
하얀 양산 펼친 듯
계단 위에 계단 있고
계단 밑에 계단 있다
능선을 돌고 돌아 정상의 문을 열자
사방四方을
둘러맨 전망대
다락 위에 내가 서다
숲은
푸른 바다
오름들 꼬릴 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노를 저어 가다
녹음을
확 둘러쓰고
하나 되는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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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가 들린다는 등산로 이름
♧ 유리창을 닦다
4월 꽃샘추위도
물러난 환한 대낮
때가 낄 때로 낀 농막의 유리창을
닦는다
하얀 걸레가
새까맣게 타버렸다
몇 번을 닦고 닦아도
창문 밖이 흐린 것은
앞만 보면 달려온
부끄러운 삶인 것을
그래도
오늘만이라도
투명하게 닦고 싶다
♧ 할미꽃
온갖 꽃 다 판다는 오일장 사철꽃집
포토에 졸고 있는 할미꽃을 본 팔순의 김씨
쯧쯧쯧
왜 여기에 있어
들에 피어야지
♧ 벌초
벌초를 한다는 것은 혈연의 끈 당기는 일
처서와 추석 사이 모인 피붙이들
무성케 자란 풀들을 가차 없이 베어내는
쒸이엥 쒸이엥 예초기 소리 멈추자
깔끔하게 다가앉은 솟은 봉분들을
가을빛 산들바람이 비질하며 지나가고
향긋한 풀 향기에 촉촉이 젖은 상석床石
술 부어 잔 올리고 엎드려 절을 하면
돌비에 새긴 이름들 나비되어 날아가는
*오영호 시조집 『농막일기』 (동학사,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