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읽는 불꽃 - 백승보
- 독서 모임
불의 혀가 나무를 무섭게 핥는다
탐욕스러운 불꽃
새까만 숯덩이가 되도록
겹겹의 나무를 통째로 삼킨다
공기에 섞인 버얼건 불의 핏자국
놀란 어둠도 더 깜깜해지고
손을 뻗으면 닿을 열기의 축제
나는 까맣게 타들어 간 나무의 문자를 손으로 더듬는다
내면을 삼키는 검은 문자의 나열들
그 나열을 줍기 위해 모인 사람들
각자 나무가 되어 자신을 태우고 싶은 사람들
태워서 소멸의 완성을 보고 싶은 사람들
눈빛 하나하나 속에
각자의 언어가
불꽃으로 담겨 있다.
♧ 즐거운 식사 - 성숙옥
산그늘이 희끗희끗 색을 품는 계절의 문 앞
내려온 햇살이 역광으로 풀잎을 세우는 것을 본다
마음의 간격에 쌓인 먼지를 하얀 입김으로 불어 내며 걷는데
깍깍거리는 까치들 나무 속 붉은 감을 붙들고 있다
흥겨워진 나뭇가지가 새소리에 몸을 비틀고
날개와 부리가 바쁜
허공이 흥겹다
가을이 펼치는 만찬 속
부리의 화음은 투명하다
새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격의 없는 모습인데
내가 마음 쓰며 배운 것들은 장식으로 남을 것인가
시간에 갇힌 인격이
거기 스민다
어느새 나는
까치들이 건네는 흥겨움을 감탄을 흘리며 받아먹고
♧ 숙제 – 오형근
어렸을 때는 숙제를 해 놓으면
잠도 잘 잤는데,
이제는 숙제를 내주는 사람도
숙제 검사를 하겠다는 사람도 없지만
내가 숙제를 내고
내가 숙제 검사를 하는데,
원하는 만큼 했어도
그때처럼
편하고 개운하지 않네
걱정이네
♧ 어족 숙명론 - 우정연
절집 처마 끝에 걸린 물고기는 경을 읽고
초가집 정제 앞에 걸린 물고기는 뼈도 못 추린다.
♧ 그외다수 - 유정남
성은 그
외다수는 이름
숨 가쁘게 달리면 아!
라고도 부른다, 가끔은 여기요로
지나가는 저기요로도 불린다
어둠은 시나리오의 뒷장
스포트라이트는 닿을 수 없는 지대다
숨겨진 꼬리에 물을 주어도 목소리는 자라지 않는다
배역은 번개로 갈아입고
줄어든 그림자는 양말짝처럼 벗어던진다
대기실 못에 걸린 옷걸이가 소금바람에 나부낀다
행인 1, 행인 2, 보름달 실은 라이더였다가
말 엉덩이로 변신하는 밤
다른 뒤편에 코를 박은 외다수가
눈보라 박차며 빙하기의 무대를 지나간다
꽃의 걸음을 따르는
봄은 그를 한 번도 관람하지 않았다
흰 머리칼이 깃털로 지고
외다수는 처음 주인공이 된다
검은 상자 짊어지고
북두칠성으로 떠오르는 혼불
별 부스러기가 극장가의 뒷골목에 흩뿌려진다
* 월간 『우리詩』 11월호(통권 제437호)에서
*히말라야산맥의 봉우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