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산바람꽃 – 정순영
새하얀 변산바람꽃이
내 안에 피니
눈 귀가 밝아져
하늘의 소리가 훤히 들리고
내가 하늘빛을 머금어
세상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네.
♧ 개밥에 도토리들 - 김동호
“개처럼 영리한
동물이 왜 그 좋은
건강식품 도토리를
먹지 않는 것일까”
반려견 전성시대
이런 질문 하나
나올 법도 한데
안 나온다
혹시 반려견 사랑이
넘쳐남이 개밥의 도토리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할 때가 있다
♧ 하늘색 책상 - 서량
-마티스의 그림 “책 읽는 소녀, 꽃병”의 소녀에게(1922)
펼쳐진 책에 어둠이 깔려요
꽃병에 꽂혀 있는 꽃
꽃에 내려앉는 기생잠자리
반만 열려 있는 여자의 눈
내 무의식도 반만 열려 있다
등에 수직으로 꽂히는 무지개
머릿속이 가려워요 캄캄해
♧ 나비 한 마리 – 이상호
불을 켜고 누우면 검은 눈을 한 개 가진
이상한 물체들이 눈 속에서 붕붕 날고 있다
어떻게 날아다닐 생각을 검은 색으로 했을까
반사경을 머리에 끼고 아래쪽과 위쪽을
공격적인 자세로 토끼몰이 하듯이
망막의 가장자리로 내몰려는 한 마리의 검은 나비
작은 몸에 날개를 감추고 날아다니는
저 작고 아름다운 것들의 삶의 방식이란
연분홍 레이저 불빛에 한 순간에 잡히는 것
까끌거리는 밤마다 눈두덩이 비비며
왜 이러지, 왜 이러지, 인과를 가봐야겠다
점처럼 보이다가도 금 가거나 깨진 나비
♧ 은하계 사진 - 여영현
병원에 다녀온 아내가 사진 한 장을 내민다
초음파로 찍은 희미한 은하의 모습이다
갓 생긴 성단이 자궁에 자리 잡은 후
처음 보내는 빛의 파장,
검은 공간에서 목화송이처럼 생명이
하얗게 부풀고 있다
인화지에 드러난 아프로스가
나의 눈길을 붙잡는다
그 은하의 중심부를 손가락으로 짚어보니
몇 억 광년 떨어진 그 곳에서
벌써 둥근 입 하나가
손가락 끝을 쪽쪽 빤다
신생의 잠이 아프로디테처럼 눈부시다
중력에 이끌린 별무리가 속속 빨려들고
그 파장에 나도 소용돌이치는데
생명의 중심부가 하, 밝다.
* 월간 『우리詩』 2023년 9월호(통권 423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