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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경희 시집 '꽃은 꽃으로 답한다'의 시(3)

by 김창집1 2026. 9. 19.

 

♧ 20분

 

휴대폰을 열어 번호를 눌렀다

 

어르신 성함은요?

토요일엔 예약이 차 있어요

일요일 오후 두 시 가능합니다

 

골목 돌아 다다른 4층 건물

주차 구분선을 밟고 비스듬히 선

자동차 한 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휠체어를 타고 내려오시는 아버지

초췌한 모습 가리던 주황색 중절모를

이제는 쓰지 않는다

 

면회 시간은 20분입니다

 

쓸모없이 여쭙는 안부 인사 대신

무릎 위 굵게 마디 잡힌 억센 손을 잡아본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배뇨주머니

삐죽 드러난 도뇨관을 따라

똑똑 떨어지는 소변 방울에 맞춰

상담실의 벽시계가 흐른다

 

삶의 짐을 가득 얹고도

가뿐한 표정을 짓던 얼굴에

궂은일 도맡던 널따란 손등에

여기저기 피어난 저승꽃

바퀴 달린 의자로 내딛는 걸음이

등 붙여 누운 침대 한 칸이

전부인 이곳에선

침묵은 그저 침묵일 뿐이다

 

온 길을 돌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오르면

망설임 없이 닫히는 문

 

음식물 반입이 불가한 이곳

긴 명절 연휴 바이러스 차단을 위해

면회가 금지되는 이곳에서

발길을 돌려 나가면 언제나 눈이 아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오랜 우정

 

스무 살도 되기 전 우리는 만났지

당당했던 너

수줍었던 나

넌 도시에서 자랐고

난 시골 토박이였지

 

너의 결혼 소식은 정말 뜻밖이었어

큰 축하를 보내고 싶었지만

마음을 대신할 지폐가 부족했어

 

일부러 동전을 준비하곤 했어

공중전화를 지나칠 때면 네가 생각났었지

 

5년쯤 전이었지 아마

너에 대한 아픈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가

너의 마음을 깊이 다독여 주고 싶었지만

우린 너무 긴 시간을 각자의 삶 속에 파묻혀 살았나 봐

 

울고 웃는 이유도,

기쁨과 슬픔의 방식도 달라진 마음의 필터링

 

자연스럽다는 건

아쉬움이 없다는 것

이제 추억이 된 사람들이 반쯤만 열어보는

옛 사진첩처럼

 

세월이 더 흘러

시간도 공간도 돌고 돌면

어디쯤

같은 곳을 보게 될까

 

 

♧ 필명을 짓던 날

 

다니던 직장을 떠날 때가 되면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자 한다고

내게 맞는 좋은 이름을 지어달라 하였다

 

건너곤 선명장

펼쳐보니

하(河) 림(林)

 

꽃길만 걸어가자

비로소 열어젖힌 이 세상에선

힘껏 사랑하고

한껏 웃어보자

운명도 손 내밀어 응원하도록

 

더께 앉은 내 마음 비장하게 녹여낼

엉킨 실타래 올올이 풀어낼

그 이름

하(河) 림(林)

 

 

♧ 택배

 

설명절 대목에 맞춰 찾아온 주말 새벽 근무

 

허공을 틈 없이 채우는 예기치 않은 눈보라는

잃어버린 시간들처럼

검은 유리창을 두드리며 문틈을 파고드는데

 

실시간 교통정보 앱 첫차의 움직임을 좇아

집을 나선다

 

승객은 3명인 버스 안

하차 벨 소리가 삐이 울린다

아들 집에 머물다 오시나?

얼어붙은 도로를 향해 신중한 걸음을 내딛는

어르신의 굽은 등 위로 눈가루가 휘돌며 날아간다

 

일요일 아침 여섯 시 삼십 분 우체국 입구

 

어두운 빙판길을 고단한 몸 앞세워 달려왔을

5톤 택배 트럭의 후미엔 재촉하듯 깜박이는 비상등

택배 상자 빼곡한 롤파렛 열두 개를 노련하게 부려놓고는

커피 한 잔도 마다하며 서두르는 그의 머리 위에

하얀 눈꽃이 가득 폈다

 

고향 집으로 보내오는 선물꾸러미엔

곱게 포장된 사랑이 곳곳에 진한 손자국으로 묻어나니

그리움 품은 노모의 학수고대는

짧은 경적에

버선발로 눈보라를 뚫으리라

 

 

♧ 회상

 

곡 허라

 

아버지의 비장한 목소리에도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머뭇머뭇

쓸모없던 내가

 

어머니 탈상하던 날

속앓이를 고자질하는

긴 편지를 썼더랬다

 

겨우 여남은 개의 머리창이

남 보기 부끄러웠다

 

그만큼만

내 마음이 닿았을까

그저

연기로 사라져 버렸을까

 

 

                     *김경희 시집 『꽃은 꽃으로 답한다』 (다층, 202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