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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산림문학' 2023년 겨울호의 시(4)

by 김창집1 2024. 2. 11.

 

 

루이스호수* 품에 안아 김학균

 

 

그렇게 많은 잔설의 눈물들이

주저리주저리 흘러 모인 퍼런 호수

빙하에 적셔있는 이름 없는 전설들

 

하늘빛 내려놓아 침엽수가 지키는

심산계곡 에메랄드빛 루이스 얼굴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희미한 잔영

 

긴 세월 놀란 뭇 시새움에 지쳐

혹등고래 먼 북극 여로를 따라갈까?

현란한 찬사에 설레는 로키 여인

 

저 온통 찬연한 루이스 쪽빛 호수

빅토리아산** 빙설도 꼭 품안에 담아

단풍지는 태백강산을 물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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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호수 : 캐나다 Banff 국립공원에 있는 UNESCO 10대 절경

**빅토리아산 : 루이스 호수 바로 앞에 있는 해발 3,464m의 산

 

 

 

 

얼음새꽃 이윤정

 

 

못다 쓴 옛사랑의 긴 편지처럼

아릿한 모습으로 눈밭에 와서

너는 무슨 온기로 버티고 섰는가!

 

어느 가슴 치는 이의 유서처럼

이 설한 매운 눈발들을 밀치고

무엇에 기운 받아 세상에 왔는가!

 

한 마리 말 잘 듣는 양이 되어

얼음과 얼음 사이 비집고 서서

누구의 가혹한 명령을 받들고 섰는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감동이라고

인간은 얼마나 약한 존재냐고

새벽에 홀로 깨어 기도하는 이처럼

 

 

 

 

그 겨울 정란

 

 

거룩한 시간이 다가온다며

그토록 잠 못 이루며

한때 따스함과 인연을 맺었던 나는

찌를 듯한 헤어짐의 아픔을 뒤로하고

온화한 미소와 따뜻한 차 한 잔 기울이며

떨어지는 낙엽 문 발을 내리고 밝은 햇빛을 가려

일부러 밤 하나 만들고

혹시나 길을 잃을까

창문 밖 하얀 풍경에 발 도장 찍어

표지판을 만들고

떨어지는 낙엽만큼이나 가벼운 나는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무거운 추를 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힘겹게 잠이 든다

 

 

 

 

             [시조]

 

산우山友 - 신후식

 

 

톡 톡 톡 때그러러

알밤이 알린 가을

청설모 휙 휙 휙

잣 잡수러 나선 길

곰 같은

한 사나이가 일구어 둔 산전 가

 

묵밭을 갈아엎는

한 무리의 멧돼지

무슨 씨를 뿌릴까

바람이 걱정하고

때맞춰 물주겠다며

구름이 지켜본다

 

엿장수도 한물가

종이상자 찾아 나선

돌이 할배 어여 와

가쁜 숨 그만 몰고

머루며 다래가 익는

청산으로 돌아와

 

 

 

 

꽃의 마음 - 진길자

 

 

빽빽한 풀숲 사이 목을 빼고 하늘 본다

뒤따라온 늦여름이 발꿈치를 올려주며

이우는

가을 햇살을

잡으라고 보챈다

 

생과 사 경계에서 힘겨운 삶이라도

튼실한 열매 맺어 이어가길 소원하며

허공에

중심을 세워

서릿발을 녹인다

 

 

                   *계간 산림문학2023/겨울호(통권5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