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풍쟁이 – 김옥순
길들여지지 않는 말들이
좌충우돌
부딪치며 날아간다
한 치도 안 되는 혀가 가시를 달고
순한 말을 매운 말로
보통 말을 찰진 말로 버무려 낸다
바람길 앞세워 나르기는 일상이다
나를 친구를
타깃으로 목덜미를 쪼아대며
믿어달라고 애원해 본들
그 말에 진실이 얼마나 녹아있는지
겪어본 사람은 다 알 일이다
커피 잔을 앞에 놓고 마주해야 했던 고통의 시간
한 가마니만큼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것을
태연한 척 받아주는 못난이 나
2000 단어를 모두 소비하는 너라는 사람
진실은 장롱 속에 넣고 꺼내지
♧ 미소 - 김정수
엄마는 먼저 간을 보고 상을 차린다.
상 치우기 전에도
손이 덜 간 음식은
엄마가 다시 간을 본다.
식구들 아무 탈 없이
하고 싶은 일 하며 살라고
엄마는 늘 간을 먼저 보고 상을 차린다.
엄마 입맛에 맞지 않으면
아예 상에도 오를 수 없다.
잘 먹었다
이 한마디 말에
엄마는 설거지까지
후딱 해치운다.
♧ 아내는 그녀가 되었다 – 김종호
시집오던 날부터
아내는 이름도 없이
‘누구 엄마’거나, ‘집사람’이더니
하늘나라로 떠나서
나의 그녀가 되었다.
사는 날 동안
몸을 비비면서
한 공간을 호흡하는 공기 같았다
들여다봐야 보이는 거울 같았다
의식 밖에서 내가 살듯이,
닻을 내리고 흔들거리는 항구였다
살아서 아내는
벽의 달력 같았는데
나를 떠난 후 내게
반짝이는 그녀가 되었다
이 방 저 방 청소할 때도
세탁기를 돌려 빨래할 때도
텃밭에 쭈그려 상추를 딸 때도
내 손길이 닿는 데마다 그녀가 있고
날 저물어 밥 말아 후르륵거릴 때에도
그녀는 내 곁에 앉아서 훌쩍거렸다
이제 내 안에
먼먼 그리움이 되어
참 쓸쓸한 별이 되었다
밤마다 글썽이는 별이 되었다.
비로소 행복한 별이 되었다.
♧ 우리가 타고 있는 지구 – 김중식
우리는 지금
23.5도로 기울어진
지구를 타고 돌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큰 집은 바로 지구입니다
이 지구는 23.5도로 삐딱하게 기울어진 채로 하루에 한 번씩 돕니다.
한 번 자전하는 시간은 24시간 걸린답니다
지구는 왜, 이리 삐딱해서 돌까요?
하루에 도는 시간을 초로 말해 보면 86,400초(24시간×60분×60초)가 걸립니다. 그러면 지구는 1초에 몇 미터나 움직일까요?
지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하루에 한 번 자전하는데,
1초에는 463m(지구의 지름이 40,000km÷86,400ch)의 속도로 돌고 있다니
느껴지십니까? 못 느끼신다고요?
태풍 때 초속 40~50m 정도 강풍이 불면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없고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 등이 뽑히면서 어마어마하게 피해를 주는데,
초속 463m! 다! 날아가 버리겠네. 왜, 못 느낄까요?
우리는 지금 이런 어마어마한 큰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지구는 인간들로 하여금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우리의 이 큰집을 위하여
아끼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지구는 우리의 생명과 같습니다.
지구가 멸망하면 우리도 멸망합니다
♧ 석양과 길손 – 김창화
한담동 해변길 걷다
소로기 동산*에 앉아 보는 황혼
서편 수평선이 저무는 해를
황금빛 애무로 열정을 불사른다.
노을진 바닷물소리
들어보면
자연이 엮는 나지막한 현의 소리
내 연륜도 지금 이 시간에 닿아
마음이 노을로 물들고
혼자서 걷는 외로운 길손의 가슴엔
모든 풍경들이 노을로 젖어든다
그간 이 길에 버무려진 기억들은
숙성된 와인처럼 향기롭다
황혼에 걸린 오늘 하루의 아쉬움
거기엔
친숙하게 번져드는 명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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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기 동산 : 한담동 해변 길에 봉긋이 솟은 돌 동산.
* 『涯月文學』 2024년 15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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