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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11)

by 김창집1 2024. 11. 20.

 

 

문패

 

 

기둥이 없어서 떠돈다

 

검지를 눌러 표정을 보려고

드나들던 음성을 기억하려고

이름을 지우지 않고 있다

 

손바닥 위에서 변조된 음성은

내가 버리지 못한 주소를 통해

매번 다르게 튀어나오고

나는 그 집을 몰래 훔쳐보기만 한다

 

돌아보면 슬픈 얼굴은

혼자 벽이 된 채 구겨져

타인으로 서 있다

 

내가 벨을 누르면 누군가 대답할까 봐

문 저 너머에서 낮은 음성으로

나를 부를까 봐

눈을 감고 바라만 보는 문패

 

빈자리가 켜지지 않도록

네모 상자를 닫으면

닿을 듯 말듯 내 어깨 위로

떨리는 온기가 지나간다

 

 


 

기억 속의 한 사람

 

 

사랑이란 말을

살아가는 것

이라 이해했다

 

옆에 없는 사람이

기억에만 저장되어

찬 얼굴을 보인다

 

한때는

황폐해진 가습에 파고드는 더 깊은

사랑의 시작이라 생각했다

 

뒤꿈치가 주저앉아 일어설 수 없으니

기대어 설

내일이 없다

 

매 순간 죽고 매 순간 살고

죽음이란

현재의 시간을 휘몰아 과거로 가버리는 것

 

사랑은 가고 없다

 

끝난 곳에

추억의 빈집만 덩그러니 있다

 

환상 속으로 몰고 가는

사랑이란 말은

 

살아 있다는 말이다

 

 


 

계절 영업

 

 

중랑천변의 계절은 바쁘고 소란스럽다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시작하기 무섭게

새 간판이 뛰어든다

 

가장 먼저 벚꽃과 튤립이 대형 난전을 펼치더니

사르르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작약이 틈새시장을 파고든다 했는데

지난겨울부터 준비해 온 개양귀비 꽃밭이

안개초를 배경으로 강 한쪽을 완전 뒤덮어버 렸다

 

지역신문이 입소문을 도배하자

한동안 사람들이 밀려와 꽃밭을 짓밟아

경비원을 세웠는데

바람은 키 큰 꽃들을 쓰러뜨렸다

개양귀비 유행이 지는 걸 대비해

코스모스를 준비하고 있지만

잠시 손님이 주춤할 기세다

 

그 사이

너무 작게 눈을 뜨고 있어 보이지 않던 개망초가

무리 지어 세를 넓히자

소박하게 차려 입은 보라 소녀 수레국화가

치맛자락을 흔들고 끼어 든다

 

어느 나라 비운의 공주 같은 샤스타데이지는

청초한 모습으로 주의를 끌었지만

소리 없이 마차를 타고 사라진 뒤

금배지를 단 금계국이 천지를 뒤덮었다

둔덕에서 자운영이 군데군데 자리를 펴보지만

워낙 색깔이 없는지라 당분간은

금계국이 밀고 갈 세상이 될 것이나

 

꿀벌은 경계 없이 꽃가루를 묻히고

환한 햇살 페달 밟으며 천변을 도느라 분분할 것이다

 

 


 

이끼

     -이 강은 초록빛 계곡을 가로지르고 대림을 가로질러 흐릅니다.

 

 

바위와 나무와 계곡에까지 온통 초록의 이끼가 덮였다

컴퓨터를 켜자 뜨는 화면

햇빛에 반짝이는 숲은 밝은 얼굴로

창을 열고 하늘을 내다보고 있다

 

거기에 소리가 없다고는

움직이는 것이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 것이고

계곡에 물이 흐를 것이고 새들이 한 번씩

화면을 흔들 것이다

 

한 번도 숲 바깥으로 외출하지 않은 작은 사람들이

보드라운 이끼 융단에 나와 앉을 것 같은

 

촉촉해지는 물가

젖은 속눈썹같이 물을 품은 이끼들

연초록 봄 같은 얼굴로

나무의 그늘을 다 받아 안고 바닥에 몸을 깔고 있다

한 세월을 견딘 가라앉은 생명들,

 

잎도 줄기도 깊은 뿌리도 없이

바닥을 덮은 초록의 집념

거기에 젖을 눈물이 없다면

깊이도 없는 땅에 발을 디밀 수 있을까

 

오래된 숲의 미명을 기록하며

저 빽빽한 초록은 나날이 아래로 내려간다

 

하늘로 가지를 뻗는 나무들보다

더 아래로 흐르는 강물보다

부드러운 손으로 어루만져지는 눈물들이 있다

원시림에서 전송된 풍경이

눈물을 머금고 파랗게 번져,

반짝이며 켜지는 기쁨들도 있다

 

 


 

칼칫국 먹는 저녁

 

 

대문을 차고 나가버린 아버지를 지우는 듯

넓고 억센 호박잎을 뒤집어

매끈하게 빛나는 갈치 은분을 쓱쓱 문질러

등에 상처를 내는 엄마

 

울음의 둘레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습니다

갈치를 토막 내는 소리만 크게 울렸습니다

 

이럴 땐 우리도 멀찌감치 떨어져

기우는 노을을 바라보거나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감고 돌았습니다

 

날 세운 하안 바지선

대리석 같은 피부에 손톱자국이라도 나면

하얗게 벼린 칼날로 무엇이든 베고 말,

그 바다에선 잘나가는 춤꾼이었습니다

 

뭇 소문을 씹으며

날은 어두워지고

비 맞은 듯 후줄근해지는 모시 저고리

 

언제 날벼락이 되어 떨어질지

긴 여름날도 배고픈 줄 모르고

유년의 저녁이 두근거렸습니다

 

아버지의 부재가 우리의 죄인 양

은비늘이 떠 있는 국물을 들이켜며

말없이 고개 숙이고 저마다 훌쩍이는

 

빛바랜 여름,

 

비린 저녁이었습니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서정시학,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