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초대석]
♧ 아버지의 앨범 – 강덕환
구순이 다 된 아버지가
지나온 세월을 길어 올리던 추억을
가져가라 한다, 그 추억 속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의 궁핍
4․3과 전쟁, 분단의 혼란기
코흘리개 모습이나 학창 시절
친구와의 우정, 어머니와의 연애
예비군, 새마을, 민방위복을 입고
조국 근대화에 앞장서던 시절
사진 한 장쯤 있을 법한데
없다, 고작해야 한국전쟁 끝나고 입대했던
군대에서의 군복차림 모습이 제일 젊다
거실 벽 괘종시계 곁에 걸기도 했던
자식이랑 손자들이 가득한 가족사진과
향교 훈장訓長 임명식 사진을 애지중지하였지만
이젠 침침한 눈, 먹먹한 귀처럼
부착식 비닐이 접착력을 잃어 너덜거리는
그 추억이 담긴 앨범을 가져가라 했을 때
요즘 세상엔 사진을 앨범에 보관하지 않는다고
스캔으로 떠서 파일로 저장해두면 천년만년
대물림할 수도 있다고, 공간만 차지하는 앨범을
이젠 ‘필요 없수다’라고 말 할 뻔했다, 하마터면
♧ 32일의 열대야 - 현택훈
여름 낱말 속에는 계곡이 들어있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물방울이 맺혀있다.
물방울은 잎사귀 장화를 신고 있다.
어렸을 때 물웅덩이에서 장화 신고 참방거릴 때
무지개처럼 담장 위를 뛰어오르던 고양이가 있었다.
편지를 쓰고 끝내 전하지 못한 채
전학 가버린 친구를 중학생 되어
우연히 영화관에서 마주쳤지만
말도 붙이지 못하고 뛰쳐나갔을 때의
그 영화 제목이 생각날 것 같은 9월이다.
올해는 유난히 더웠다고,
이렇게 더운 여름 처음이었다고
가을인데 여전히 에어컨을 켠 찻집에서 쓴다.
♧ 이월 - 김남규
소년은 겨울에게
사정없이 끌려 다녔어
풀려났으나 갈 데 없고
끝내 도착한 소녀의 식탁
울 때까지 먹었어
아니 울지 않고
먹었지
소년은 말하지 않았어
소녀도 묻지 않았지
흥얼거린 노래와 이야기
손뼉 치면 밤 하나 끝나고
소년은
봄이라고 말했어
소녀가
안아주었지
♧ 구름양 구름사자 – 서숙희
비 끝낸 하늘이 양 한 마리 낳았다
천천히 가벼이 흰 뿔이 놀고 있는데
큰 몸에 큰 이빨 세운 사자가 다가왔다
한판 생존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데
양의 뿔 사자 이빨이 서로를 쓰담쓰담
하늘들 세렝게티에는 흰 평화가 한창이다
♧ 유배지의 밤 – 임채성
-대정에서
구름의 그림자가 초집 마당 기웃댄다
방파제에 갇혀 우는 가녀린 파도 소리
바람에 찢겨진 허공 먹물이 번져간다
그리운 것은 모두 아프도록 멀리 있다
중년의 빈 술병에도 자물쇠가 채워지고
쓰다 만 독백체 문장 자획들이 꼬인다
천 개의 해가 떠서 스러진 처마 끝에
닳고 닳은 목숨인 양 외등을 밝혀 봐도
별빛은 검은 돌담을 끝내 넘지 못하고
어둠에 붓을 적서 참회록을 쓰고픈 밤
더운 피 하소하듯 들창을 가만 열 때
연착된 새벽 동살이 문지방을 넘는다
* 혜향문학회 간 『혜향문학』 2024 하반기호(통권 제23호)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흰애기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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