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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혜향문학' 2024년 하반기호의 시(1)

by 김창집1 2024. 12. 20.

 

 

              [문인초대석]

 

 

아버지의 앨범 강덕환

 

 

구순이 다 된 아버지가

지나온 세월을 길어 올리던 추억을

가져가라 한다, 그 추억 속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의 궁핍

43과 전쟁, 분단의 혼란기

코흘리개 모습이나 학창 시절

친구와의 우정, 어머니와의 연애

예비군, 새마을, 민방위복을 입고

조국 근대화에 앞장서던 시절

사진 한 장쯤 있을 법한데

없다, 고작해야 한국전쟁 끝나고 입대했던

군대에서의 군복차림 모습이 제일 젊다

거실 벽 괘종시계 곁에 걸기도 했던

자식이랑 손자들이 가득한 가족사진과

향교 훈장訓長 임명식 사진을 애지중지하였지만

이젠 침침한 눈, 먹먹한 귀처럼

부착식 비닐이 접착력을 잃어 너덜거리는

그 추억이 담긴 앨범을 가져가라 했을 때

 

요즘 세상엔 사진을 앨범에 보관하지 않는다고

스캔으로 떠서 파일로 저장해두면 천년만년

대물림할 수도 있다고, 공간만 차지하는 앨범을

이젠 필요 없수다라고 말 할 뻔했다, 하마터면

 

 


 

32일의 열대야 - 현택훈

 

 

여름 낱말 속에는 계곡이 들어있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물방울이 맺혀있다.

물방울은 잎사귀 장화를 신고 있다.

 

어렸을 때 물웅덩이에서 장화 신고 참방거릴 때

무지개처럼 담장 위를 뛰어오르던 고양이가 있었다.

 

편지를 쓰고 끝내 전하지 못한 채

전학 가버린 친구를 중학생 되어

우연히 영화관에서 마주쳤지만

말도 붙이지 못하고 뛰쳐나갔을 때의

그 영화 제목이 생각날 것 같은 9월이다.

 

올해는 유난히 더웠다고,

이렇게 더운 여름 처음이었다고

가을인데 여전히 에어컨을 켠 찻집에서 쓴다.

 

 


 

이월 - 김남규

 

 

소년은 겨울에게

사정없이 끌려 다녔어

풀려났으나 갈 데 없고

끝내 도착한 소녀의 식탁

울 때까지 먹었어

아니 울지 않고

먹었지

소년은 말하지 않았어

소녀도 묻지 않았지

흥얼거린 노래와 이야기

손뼉 치면 밤 하나 끝나고

소년은

봄이라고 말했어

소녀가

안아주었지

 

 


 

구름양 구름사자 서숙희

 

 

비 끝낸 하늘이 양 한 마리 낳았다

천천히 가벼이 흰 뿔이 놀고 있는데

큰 몸에 큰 이빨 세운 사자가 다가왔다

 

한판 생존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데

양의 뿔 사자 이빨이 서로를 쓰담쓰담

하늘들 세렝게티에는 흰 평화가 한창이다

 

 


 

유배지의 밤 임채성

      -대정에서

   

 

구름의 그림자가 초집 마당 기웃댄다

방파제에 갇혀 우는 가녀린 파도 소리

바람에 찢겨진 허공 먹물이 번져간다

 

그리운 것은 모두 아프도록 멀리 있다

중년의 빈 술병에도 자물쇠가 채워지고

쓰다 만 독백체 문장 자획들이 꼬인다

 

천 개의 해가 떠서 스러진 처마 끝에

닳고 닳은 목숨인 양 외등을 밝혀 봐도

별빛은 검은 돌담을 끝내 넘지 못하고

 

어둠에 붓을 적서 참회록을 쓰고픈 밤

더운 피 하소하듯 들창을 가만 열 때

연착된 새벽 동살이 문지방을 넘는다

 

 

 

               * 혜향문학회 간 혜향문학2024 하반기호(통권 제23)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흰애기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