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맞이
어제 같았던 풍경이 한소끔 달라졌다
가만히 둘러보니
가을이었다
골목을 정리하고 쓸다가
담벼락에 앉아
볕을 쬐는 노인들
지난여름 볕에
잘 마른 부드러운 바람이
앞머리를 넘겨준다
하늘도 억새도 바라볼 새 없이
가을,
바깥으로 퍼진다
♧ 종이비행기
종이를 접어 그 눈부신 하늘로 쏘아 올렸던 때가 있었다
꿈을 접어 함께 그 파란 하늘로 날렸다
더 높은 곳으로 날아 올리기 위해 나무에도 오르고
울담과 오름에도 오르던, 내 유년의 가슴
한참 시간이 지났다
다시 종이를 접어 그 찬란한 광야로 날리게 되었다
꿈을 접어 함께 그 넓은 광장으로 날렸다
더 먼 곳에 도달하기 위해 있는 힘껏 내던졌고
종이의 질도 걱정하던, 내 젊음의 머리
또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내 꿈과 함께 높게만, 멀리만 보내자고 했던
그 종이비행기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땅에 박히고 꼬꾸라지고 나뒹굴었음을 안, 내 육순의 다리
참 오래도 걸렸다
♧ 바람에 날리는 추억
기억 속을 거슬러 올라가면
추억 속의 네가 기다리고 있을까 싶어
무작정 길을 나서네
기억 속 선택한 삶의 길과
추억 속 버려진 꿈의 길 위에서
서성거리는 나를 보네
기억 속 꿈을 그리던 일이
추억 속 꿈이 되어버린
차마 잊히지 못한 날들을 마주 하네
기억 속의 날들은 얼굴만 내밀고
추억의 몸통은 나선 길 위 벌레 먹은 낙엽이 되어
하염없이 바람에 날리네
♧ 할망과개미
을생(乙生)이 할망은
오늘도 ‘그렇다’ - 어김없이
감귤밭 나무 밑에 있었다
나무 아래 달린 것들만
그 굽은 손이 닿는다
꽈-악 잡은 손에서 과물 하나가 거칠게 떨어진다
마천루처럼 뻗어 있는
개미굴 위에,
잠시
아마도 잠시
그들은 서로를 응시했으리라, 그 뿐
다시
할망은 나무로, 개미들은 흙덩이로 굽은 허리를 움직인다
그들은 계획이 없다
그들은 내일을 예측할 수도 없다
오늘 내가 할 일만 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준 일을 한다
단지,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할망은 밀감 하나를 또 따서 담고
개미는 흙덩이들을 또 굴려 쌓는다
♧ 별․2
구름을 뚫고 내려오지 못해
안달이 난
별을 찾아
밤마다 밤마다 바다는 흐르고
밖으로 나온 별은
몸에 와 닿는
바다 바람이 서러워
바다로 떨어지고 마네
그믐달 밑에서 나는
흐르는 바다에 익사한
별빛 이나마 주워 담으려 하네
*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 (월간문학편집부,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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