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연정 – 현문길
-보길도에서
정자에 비 내리면
푸른 옷소매
젖을까 스치는 미소
술잔에 고이는 아련한 눈길
몇 년을 보아도 떨릴 눈매
빨간 동백으로 피어
가슴 젖는 날
하안 물새 한 마리
파닥거리는 사랑 물고
연못 위 감돈다
♧ 보길도 연정 – 홍연서
꿈엔들 잊으리 비몽사몽 그리던 곳
20년 세월 돌아 어떨결에 찾아드니
반겨줄 님은 백골이 되었어도
연꽃 같은 세연정 감흥에 젖네
따듯한 찻잔 마주할 때
뱃고동 소리 울리며 떠나던 여객선
넋 잃고 굽어보며
저 배 타면 언제오나
육지땅은 밟지 않으리란 옹알이를 조아렸지
식어버린 한 잔의 커피를 두고였어
동대 서대에서 춤추던 무희들
청초하고 향긋한 꽃내음에
억겁의 세월 돌아 지금
윤회의 삶으로 가없이 사네
롤러코스트로 누비던 인생살이
구름 한 점 바람 한 자락 물고
안빈낙도의 삶 살았던 님 곁으로 돌아오니
초목이 등 토닥이네
♧ 때론 남편에게 미안하다 - 강윤심
오른쪽 목선으로부터
어깻죽지까지의 갑작스런 통증
돌아누워 일어날 수도 없다
그해 여름 새벽길
비보 실은 소낙비처럼 아프다
자정 넘어 서쪽 하늘 달무리
유리창에 걸려 있을 즈음 가게 문 닫는
칠순의 반백 머리카락을 한 남편은
아직도 깊은 잠결이다
한의원 가기 위해 겨우 거북목을 하고
나는 지난날들의 가족에 깊은
남편을 애처로이 깨우다
파스 물이 번지듯 싸아한 나의 목젖
♧ 당신은 촛불입니다 – 김대운
북극성 바라보며
어둠의 길 거닐어
복수초처럼 차가운 등
녹여낼 방바닥을 만들었습니다
연탄불에 고기 구워주며
귀동냥으로 인생을 배우고
힘들어하는 단골손님들
아껴두던 뒷고기로 촛불이 되었습니다
눈 내리는 창밖
검은 오토바이 윙윙거리는데
깊어가는 저녁
가지런히 놓인 식탁에서
앵커의 목소리를 들으며
덜덜 떨고 있습니다
연골 없는 무릎
우편함에 쌓이는 노란 종이들
직장 찾아 헤매는 자식들
하소연할 곳 없는 마음에
현기증이 머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당신은 등나무가 되었고
촛불이 되었습니다
♧ 먼물깍에 들다 – 김도경
하늘 먼 길 끝자락에서
내리사랑이 품는다
물에 잠긴 구름
한줌 뜬 손에서 떨어져 내리고
딸자식 눈에 밟힌 어머니
먼물깍* 반영에 들었다
그날, 폭발했던 화산은
가습 기저에 용암으로 굳었다
요철로 각인된 굴절에
비가 오면 눈물이 고였다
걸러내지 못하면
병이 된다고
품고 토닥이면
별거 아니라던 어머니
이랑이랑 머무는 먼물깍
네 고생까지 내가 사서 했다는
이젠 편안할 거라는 말씀
바람 타고 방사탑을 거닌다
어머니 손잡고 촐랑거리던
여섯 살배기로 따라 걷는
초로의 딸자식 앞에
햇살이 꽃점으로 내린다
숲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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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물깍 : 동백동산 곶자왈 속에 있는 습지.
*한라산문학동인회 간 『한라산, 보길도를 품다』 2024. 제37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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