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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한라산문학' 2023년 제36집의 시(1)

by 김창집1 2024. 1. 7.

 

 

[초대시]

 

 

모깃불 송상

 

 

창밖, 눈송이들

바람을 걷어차며 오르고 있었다

 

죽어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시선들

허공은 모든 것을 삼켜서 좋았다

 

눈에 덮었던 것들이

닫힌 몸을 두런두런 서로서로 두드렸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눈밭의 치아가 빛나 보여서

투전판처럼 눈을 뭉쳐 공중으로 던졌다

 

날아간 것들은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저녁은

억압받지 않은 식빵으로 충분했다

 

 

 

 

눈이 벌건 사내에 대하여 - 양전형

 

 

시는 가난보다 아래에 있다

아니, 명예나 부유보다 위에 있다

아아니, 어쩌면 시는 릴케나 헷세처럼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며, 어둠과 밤이슬을 좋아하는

눈이 벌건 사내

 

그는 가끔 들개가 되고 싶어한다

시가 찾아올 듯하고 본능이 고개 들면

벌건 눈을 하고 목청껏 짖어대다가

불결한 곳에 널브러진 뼈다귀라도 물어

은밀한 공간으로 숨을 수 있고

옷 입고 벗기에 편리하도록

진화되어 없어진

뒷꼬리 몫까지 앞꼬리가 길게 늘어나면

대낮 길가에서 자유롭게 그 짓을 하는

눈알이 벌건 들개가 되고 싶어 한다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며

비교적 머리를 잘 굴릴 뿐이라며

배꼽 밑으로는 인격이 없다며

입에다 인격을 잔뜩 갖춘 사람들 앞에서는

뭐라 할 말이 없지만

그는 문득문득 들개가 되고 싶어 한다

 

그는 고해성사를 배꼽 아래쪽으로 한다

예를 들면, 아침마다 신성한 화장실에 앉아

어제의 욕심들을 낱낱이 고백하듯이

 

그래서 그는

입으로 주고받는 종교가 없는가 보아

그의 입에서는 가끔 개소리가 떨어진다

개 같은 사람인가 보아

 

 

 

 

[테마시] 천재지변

 

 

삶과의 섭리 - 김항신

 

 

천재지변이란 게

모든 삼라만상의 이치인 것

어찌 그 뜻, 거스르리

다만,

주어진 일상에 복귀하며

사는 자는 그렇게

회귀의 본능으로 살아야 하는

우주의 법칙인 것

 

 

 

 

투명 방음벽 양대영

 

 

꽃과 나무들이 보이고

저 너머의 산까지 훤히 보였다

 

그곳까지 날아가고픈 새 한 마리

기어이 작심하고 뛰어들었다

 

소음 때문에 자세히 듣진 못해도

! 소리가 났을 것이다

 

바로 즉사한 새 한 마리

피가 철철 낭자하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생의 끄트머리

눈물도 없다

 

깃털 하나 펄럭이며 날아가고

먹구름이 몰려온다

 

천둥 번개가 칠 조짐이다

 

 

 

 

국지성 호우 양순진

 

 

  하필 편두통 찾아온 밤

 

  잊었던 당신 기억 우리창 밖에서 유리창 안으로 잠복했다 한쪽으로 치우친 통증이나 쓸쓸한 감정은 집중호우 같은 것 흠뻑 젖고 나서야 태양과 접속하므로 한시도 방관해선 안 된다 흘러가는 것은 낙루처럼 엉기다 투박한 기억만 성벽으로 남기고 섬멸한다 도서관보다 자주 가던 여름 병원 냄새는 다발성 집중호우처럼 지리멸렬하게 온 밤 폐부까지 적신다

 

  우리, 사랑했을까

 

  드라마 캐릭터들이 빗줄기처럼 여러 각도로 클로즈업되는 밤 독서를 끊은 계절보다 더 심란하다 아직도 외부인 접근 금지하는 인도 어느 섬 원주민처럼 고립은 고독의 주범자 당신 아닌 모든 것은 사이코라 단정짓는 밤 새벽 두 시, 침수되는 어느 골짜기와 강과 옛집과 당신의 기억 천둥과 번개가 폭죽처럼 터지는 그 출입제한구역으로 붉은 장미꽃 연서 보낼 수 있을까

 

  오래 전에 폐쇄된 우리의 통로

 

  잠깐 안개꽃 피어나기도 했지만 개통되기도 전에 심야에 발효된 게릴라성 호우로 우리 관계는 아열대성기후 진입 그 변화무쌍한 우기 지대로는 오랫동안 건너가지 못할 것이다

 

 

    *한라산문학 제36한라산에서 보말을 캐다(한라산문학동인회,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