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젊은시조문학회 작품집 '빛이 나는 증거품'의 시조(2)

by 김창집1 2024. 1. 12.

 

 

빌레못굴 달개비꽃 - 강영미

 

 

소리 내지 마세요, 해가 지지 않았어요

빌레못굴 쇠창살 봉인된 어둠에 대고

달개비 퍼런 입술이 달달 떨고 있네요

 

빨갱이로 죽은 이후 내 피는 투명해요

내쉰 숨 들킨 이후 숨소리도 내지 않죠

돌벽에 메쳐진 이후 다신 울지 않아요

 

엄마 누이 다 죽어도 죽인 사람은 없대요

피 묻은 돌벽에서 탯줄처럼 마르지만

뽑혀도 다시 자랄 뿐 마디마디가 오늘이에요

 

 

 

 

접시꽃 고혜영

 

 

꽃들의 세상에는 선착순이 아니었구나

꽃들 사는 법이 사람과는 다르다며

한 계단 두 계단 오르다 힐끗 나를 보는 꽃

 

장마철 앞두고서 꽃 피고 꽃 지는 길

초여름 꽃들에겐 작심삼일이 없는 것 같아

접을까 말까 하다가 또 한 송이 올린다

 

 


 

무명천 김미향

 

 

나의 죄목은

살아있었다는 사실 하나

 

죽어도 죽여도

죽을 수가 없는 목숨

 

월령리 화산회토에 억척으로 버텨서

 

죽어서 천 년 만 년

삭아져서 천 년 만 년

 

꼭꼭 싼 천을 풀어

열두 대문 넘는다 해도

 

진아영,

이름만으로 빛이 나는 증거품

 

 

 

 

폭낭의 아이들 김선

 

 

푸름이 깊어지면 눈물이 되나 보다

다시 온 4월에도 푸른 기색 없는 하늘

명도암 43공원에 봄비가 오고 있다

 

희생된 어린 영혼 사월이면 피가 돌아

각명비에 새겨진 세월의 눈물 자국

나직이 이름 부르면 접힌 날개 퍼덕일 듯

 

북촌리 넓은 돌밭 바람 많은 어두운 숲

피 맺힌 폭낭의 굽은 역사 끌어안고

서러운 동백 보자기 너븐숭이로 흐른다

 

 

 

 

봄바람 너의 가슴에 김순국

 

 

작고 여린 것들에겐 내 눈길이 자주 갔어

남자 형제 기에 눌린 빼빼 내가 떠올랐어

약 한 첩 먹지 못하고 골골하며 자랐지

 

네 어깨가 으쓱으쓱 어깨춤을 추는구나

하니야! 넉 달만에 느낌표를 날려줬어

봄바람 너의 가슴에 노란 등을 켰구나

 

-유채꽃 관찰일기 파종 167일째

 

 

            * 젊은시조문학회 작품집 빛이 나는 증거품2023 9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