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레못굴 달개비꽃 - 강영미
소리 내지 마세요, 해가 지지 않았어요
빌레못굴 쇠창살 봉인된 어둠에 대고
달개비 퍼런 입술이 달달 떨고 있네요
빨갱이로 죽은 이후 내 피는 투명해요
내쉰 숨 들킨 이후 숨소리도 내지 않죠
돌벽에 메쳐진 이후 다신 울지 않아요
엄마 누이 다 죽어도 죽인 사람은 없대요
피 묻은 돌벽에서 탯줄처럼 마르지만
뽑혀도 다시 자랄 뿐 마디마디가 오늘이에요
♧ 접시꽃 – 고혜영
꽃들의 세상에는 선착순이 아니었구나
꽃들 사는 법이 사람과는 다르다며
한 계단 두 계단 오르다 힐끗 나를 보는 꽃
장마철 앞두고서 꽃 피고 꽃 지는 길
초여름 꽃들에겐 작심삼일이 없는 것 같아
접을까 말까 하다가 또 한 송이 올린다
♧ 무명천 – 김미향
나의 죄목은
살아있었다는 사실 하나
죽어도 죽여도
죽을 수가 없는 목숨
월령리 화산회토에 억척으로 버텨서
죽어서 천 년 만 년
삭아져서 천 년 만 년
꼭꼭 싼 천을 풀어
열두 대문 넘는다 해도
진아영,
이름만으로 빛이 나는 증거품
♧ 폭낭의 아이들 – 김선
푸름이 깊어지면 눈물이 되나 보다
다시 온 4월에도 푸른 기색 없는 하늘
명도암 4․3공원에 봄비가 오고 있다
희생된 어린 영혼 사월이면 피가 돌아
각명비에 새겨진 세월의 눈물 자국
나직이 이름 부르면 접힌 날개 퍼덕일 듯
북촌리 넓은 돌밭 바람 많은 어두운 숲
피 맺힌 폭낭의 굽은 역사 끌어안고
서러운 동백 보자기 너븐숭이로 흐른다
♧ 봄바람 너의 가슴에 – 김순국
작고 여린 것들에겐 내 눈길이 자주 갔어
남자 형제 기에 눌린 빼빼 내가 떠올랐어
약 한 첩 먹지 못하고 골골하며 자랐지
네 어깨가 으쓱으쓱 어깨춤을 추는구나
하니야! 넉 달만에 느낌표를 날려줬어
봄바람 너의 가슴에 노란 등을 켰구나
-유채꽃 관찰일기 파종 167일째
* 젊은시조문학회 작품집 『빛이 나는 증거품』 2023 제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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