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강차 – 부정일
동네 까막눈 순덕이 엄마도 아는데
고뿔에 따뜻한 생강차가 좋은 점
모르는가
코쟁이 기침 한 번에 코스피는 S증권 문지방
복부인 신발 걸려 넘어지듯
꼬꾸라지는데
여인은 입춘에 나다니면 안 되나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공자님 말씀인가요
찬바람에 조심하란 말이겠지요
물구럭 같은 서방이 굽 높은 건 아니라고
툭 던지려다 립스틱 바르고 색안경 콧등 걸쳐
기어이 나서는데
그러니까 코스피처럼 만신창이로 절룩거리며
감기까지 달고 왔잖아요
그런데도 안쓰러워 밉지 않던가요
서방이라고 말없이 군불 때는데
순덕이 엄마도 아는 생강차 한 잔 하고
이불 쓰고 기다릴 수밖에
♧ 긴 겨울밤 어찌 보내셨습니까? - 송인순
밤새 하얀 눈
마당 한 가득 준비해 놓더니
아침 기운에 비가 되어
겨울 아침 다시 잠들게 합니다
참으로 그리웠습니다
참으로 기다렸습니다
맨발로 뛰어나가는 마음은
밤새 뜬눈 지새게 하고
새벽녘 선잠은
왔다 가는 발걸음 소리도 잊게 합니다
♧ 운명의 장난 – 양대영
도로변에서 빠르게 달리다
신호에 걸려 멈춰 섰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그녀가 치맛자락을 날리며 서 있다
그곳이 어디었더라
아무리 머릿속을 더 빠르게 회전해도
잡히지 않는 흔적
어릴 적 손목이라도 잡았었나,
맑은 눈물이라도 닦아준 적이 있었나
희미하게 다가오는
이 간격의 설렘
백미러로 흘깃 다시 훔쳐보는데
마지막 벚꽃 한 잎
무참하게 떨어지고 있다
♧ 달력에 핀 백일홍 – 양순진
빼곡히 적힌
7월 달력을 넘긴다
달이 해를 넘어가듯
달과 달이 맞물릴 때
일상으로 배불뚝이 된 달력
기우뚱 위태하게 키운다
한 달 한 달이 전쟁처럼 치열하다
달이 기우는 방향으로
마음은 서둘러 직진하고
백야보다 긴 한 달이 접히면
달력에게선 쉰 소리가 난다
색색이 동그라미들이
하나하나 사선으로 지워질 때
어디선가 빠뜨리고 온
행성을 생각하는 밤
거기, 아직 늙지 않는 내가
백일홍을 키우고 있다
8월 달력엔 배롱나무 그늘 속
지워버린 동그라미들이
부화하길 바란다
달력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날
백일홍이 온전히 분홍색으로
화장할 수 있게 사뿐히
♧ 반얀나무 아래서 – 정순자
깊은 산골 라방 성지*, 반얀나무 아래서
둥근 달빛 등지고 홀로 푸르게 빛나는 여인
당신 품에 안겨드는 자녀들 위해
‘내가 있으니 염려 말라’ 품어주는 분
당신 발 앞에 뜨거운 눈물로 밝힌 촛불은
계단에 계단을 이어 은하처럼 빛나고
당신을 지키는 반얀나무들의 기억이
피 흘리며 쓰러져간 자녀들 위해
비 눈물 하나 되어 아래로 아래로
슬픔 달래는 노래로 흐르오니
어둠 속, 폐허 된 종탑의 삼종 소리는
그날, 성전이 무너지던 날
슬프게 울렸을 하늘의 소리로 들려와
세상 모든 시간은 멈추어
그날의 총소리도 피눈물도
오직 당신의 품안에서 그쳤으나
넋을 위한 연가 빗줄기는 멈출 수 없어
푸른 반얀나무 마르지 않는 생수로
목마른 이들의 영원한 희망인 당신
라방 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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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방 성지 : 베트남 중부 산골마을에 있는 가톨릭 성모발현 성지.
*한라산문학 제36집 『한라산에서 보말을 캐다』 (한라산문학동인회,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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