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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한라산문학 작품집 '한라산에서 보말의 캐다'의 시(4)

by 김창집1 2024. 2. 15.

 

 

생강차 부정일

 

 

동네 까막눈 순덕이 엄마도 아는데

고뿔에 따뜻한 생강차가 좋은 점

모르는가

코쟁이 기침 한 번에 코스피는 S증권 문지방

복부인 신발 걸려 넘어지듯

꼬꾸라지는데

 

여인은 입춘에 나다니면 안 되나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공자님 말씀인가요

찬바람에 조심하란 말이겠지요

물구럭 같은 서방이 굽 높은 건 아니라고

툭 던지려다 립스틱 바르고 색안경 콧등 걸쳐

기어이 나서는데

 

그러니까 코스피처럼 만신창이로 절룩거리며

감기까지 달고 왔잖아요

그런데도 안쓰러워 밉지 않던가요

서방이라고 말없이 군불 때는데

순덕이 엄마도 아는 생강차 한 잔 하고

이불 쓰고 기다릴 수밖에

 

 

 

 

긴 겨울밤 어찌 보내셨습니까? - 송인순

 

 

밤새 하얀 눈

마당 한 가득 준비해 놓더니

아침 기운에 비가 되어

겨울 아침 다시 잠들게 합니다

참으로 그리웠습니다

참으로 기다렸습니다

맨발로 뛰어나가는 마음은

밤새 뜬눈 지새게 하고

새벽녘 선잠은

왔다 가는 발걸음 소리도 잊게 합니다

 

 

 

 

운명의 장난 양대영

 

 

도로변에서 빠르게 달리다

신호에 걸려 멈춰 섰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그녀가 치맛자락을 날리며 서 있다

 

그곳이 어디었더라

 

아무리 머릿속을 더 빠르게 회전해도

잡히지 않는 흔적

 

어릴 적 손목이라도 잡았었나,

맑은 눈물이라도 닦아준 적이 있었나

희미하게 다가오는

이 간격의 설렘

 

백미러로 흘깃 다시 훔쳐보는데

마지막 벚꽃 한 잎

 

무참하게 떨어지고 있다

 

 

 

 

달력에 핀 백일홍 양순진

 

 

빼곡히 적힌

7월 달력을 넘긴다

 

달이 해를 넘어가듯

달과 달이 맞물릴 때

일상으로 배불뚝이 된 달력

기우뚱 위태하게 키운다

 

한 달 한 달이 전쟁처럼 치열하다

달이 기우는 방향으로

마음은 서둘러 직진하고

백야보다 긴 한 달이 접히면

달력에게선 쉰 소리가 난다

 

색색이 동그라미들이

하나하나 사선으로 지워질 때

어디선가 빠뜨리고 온

행성을 생각하는 밤

 

거기, 아직 늙지 않는 내가

백일홍을 키우고 있다

8월 달력엔 배롱나무 그늘 속

지워버린 동그라미들이

부화하길 바란다

 

달력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날

백일홍이 온전히 분홍색으로

화장할 수 있게 사뿐히

 

 

 

 

반얀나무 아래서 정순자

 

 

깊은 산골 라방 성지*, 반얀나무 아래서

둥근 달빛 등지고 홀로 푸르게 빛나는 여인

당신 품에 안겨드는 자녀들 위해

내가 있으니 염려 말라품어주는 분

 

당신 발 앞에 뜨거운 눈물로 밝힌 촛불은

계단에 계단을 이어 은하처럼 빛나고

당신을 지키는 반얀나무들의 기억이

피 흘리며 쓰러져간 자녀들 위해

비 눈물 하나 되어 아래로 아래로

슬픔 달래는 노래로 흐르오니

 

어둠 속, 폐허 된 종탑의 삼종 소리는

그날, 성전이 무너지던 날

슬프게 울렸을 하늘의 소리로 들려와

세상 모든 시간은 멈추어

그날의 총소리도 피눈물도

오직 당신의 품안에서 그쳤으나

넋을 위한 연가 빗줄기는 멈출 수 없어

푸른 반얀나무 마르지 않는 생수로

목마른 이들의 영원한 희망인 당신

라방 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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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방 성지 : 베트남 중부 산골마을에 있는 가톨릭 성모발현 성지.

 

 

     *한라산문학 제36한라산에서 보말을 캐다(한라산문학동인회,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