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드 아일랜드
먼 바다 외딴섬에 한 손 얹어
마음 한구석 잠든 나의
어린 어깨를 건드려 본다
하루 몇 번 우는 새 달래느라
격랑에 제 몸을 깎던 소년이
배 끓는 줄 모르고 뒤척이는 동안
비둘기 한 마리 날아와
내 뱃속에 둥지를 틀곤 한다
푸른 하늘 붉고
버짐 번져 오면
새는 구우, 구우
창피해서 운다
난 궁하지도 노엽지도 않다
너 같은 건 없이도 산다
모래톱에다 깃털로 끼적이면
새는 신이 나서 맨바닥을 쪼다가
너는
못 먹어서
진 빠진다
낯 뜨거운 저녁 물러날 적
새와 나는 창피해서 울다가
긴긴밤 잔다
이 갈며
배부른 꿈꾼다
♧ 그림으로 가는 사람
내 모습을 그려 달라 했다
늙은 화가는 캔버스 앞에서 심오해진다
붓을 들고 한참을 밑그림만 그린다
나라면 얼굴 먼저 그렸을 텐데
마음을 부러 비껴가기라도 하듯
붓 끝은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의 물결에 이른다
그 위에 난파선 하나, 낡은 집 한 채 떠내려간다
썰물을 따라 나도 쓸려 간다
저녁 무렵 해안가에 이르면
까치발로 선 채 어른과 키를 재던 어린 내가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나를 그려 달라 했는데
곧은길을 걸어왔다고 믿었는데
화가는 굽은 길을 따라 걸어오는 그림자를
내 뒤꿈치에 닿게끔 색칠한다
고개를 젓더니 액자를 옆구리에 끼고
물러나면서 기다란 등을 보인다
나는 수첩을 꺼내 당신과
굽은 길과 긴긴 그림자를 만년필로 잇는다
가는 길 외롭지 않게 어깨에
손도 하나 올려 본다 잡히지 않는 당신
그려 둔 모래성을 발로 차본다
바닷물이 엎질러진 캔버스엔
한데 뒤섞인 얼굴이 주름져 있다
당신인 것도 나인 것도 같다
♧ 사이키델릭
눈앞에서 흘러내리는 빙하와 바다, 설산
지축이 흔들리는
어느 유배지의 백야를 보며
나와 함께 누워
눈에 뒤덮여 얼어 가고 있다
나는 이 몽롱하고 졸린 기분이 좋아서
주머니 속 네 손을 잡고 움직이지 않는다
프렌치 키스를 하면서
세상의 종말을 준비한다
망토를 두른 태양신의 망나니는
나를 둘러싸 얼굴에 검을 겨눈다
그 사람은 죄가 없어요
다 내 탓이에요
그래, 차라리 내 눈을 멀게 해 주세요
눈을 찔러 주세요
빙하도 수평선도 눈산도
그리고 너도 칼에 난자당해
하얀 피를 쏟는다
그 벌어진 틈을 비집고 나오면
일순 집채만 한 소용돌이는
어느 아열대 기후의 해안가의 아침
조난된 배 위에
나 홀로 남겨 버리는 것이다
너 빼고 다 보이는
장님이 되고 마는 것이다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 (걷는 사람 시인선 108,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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