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의 중심 - 정세훈
몸의 중심으로
마음이 간다
아프지 말라고
어루만진다
몸의 중심은
생각하는 뇌가 아니다
숨 쉬는 폐가 아니다
피 끓는 심장이 아니다
아픈 곳 !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처 난 곳
그곳으로
온몸이 움직인다
♧ 한평생 다 거덜낸다 – 임보
텔레비전 쳐다보며 따라 웃다
페이스북 뒤적이며 기웃거리다
한 세월 다 거덜낸다
이 집에서 이 술 한잔
저 집에서 저 술 한잔
신나게 걸치며 헤롱대다
한 청춘 다 거덜 낸다
어떤 자는 돈 찾아,
어떤 자는 사랑 찾아,
또 어떤 자는 벼슬 찾아 어정대다
한평생 다 거덜 낸다
나도 시詩에 걸려
쓸데없이 ‘말’ 찾아 헤매다
한 세상 다 거덜 냈다.
♧ 첫눈 – 정순영
아침마다
게으른 수렁에서
손잡아
거울 앞에 세우는
해맑은 하늘빛 머금은
변산바람꽃을 만나러 나서니
하늘이 설레며
첫눈이 내리네
내 안에
사륵사륵 쌓이는 은혜
하늘 깊은 곳에서
축복의 거룩한 찬송이 들리네
♧ 자작나무 – 위인환
하늘만 보고 살았습니다
몸 부서지고 뼈 드러나도,
강풍에 추락한 별
심장을 후벼 팠습니다
도금된 장식품 같은 위선
한 겹씩 벗을 때마다
부처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앞만 보고 가는 일방통행에
되돌이표는 없습니다
다 버리고 가볍게 살라는
경전 같은 말
자작자작 씹히고 있습니다
♧ 모란 – 이동열
모란이 부풀고 있다
닫힌 푸른 대문
가득히
문이 열린다
꽃잎이 떨어진다
겨울 꽃 한 바구니 인 어머니
앞치마 빛바랜 빨간 모란에서
겨울 물 냄새가 난다
내 손등에 떨어진 모란 씨앗 같은
얼룩을 쓰다듬는다
벌써 꽃이 피려고 하네,
한 말씀 던지고 모란잎 같은
손을 가져가신다
놓고 가신 오래된
모란이 피고 있다
* 월간 『우리詩』 2024년 3월호(통권 제42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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