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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의 시(4)

by 김창집1 2024. 3. 12.

 

 

버드 아일랜드

 

 

먼 바다 외딴섬에 한 손 얹어

마음 한구석 잠든 나의

어린 어깨를 건드려 본다

 

하루 몇 번 우는 새 달래느라

격랑에 제 몸을 깎던 소년이

배 끓는 줄 모르고 뒤척이는 동안

 

비둘기 한 마리 날아와

내 뱃속에 둥지를 틀곤 한다

 

푸른 하늘 붉고

버짐 번져 오면

 

새는 구우, 구우

창피해서 운다

 

난 궁하지도 노엽지도 않다

너 같은 건 없이도 산다

 

모래톱에다 깃털로 끼적이면

새는 신이 나서 맨바닥을 쪼다가

 

너는

못 먹어서

진 빠진다

 

낯 뜨거운 저녁 물러날 적

새와 나는 창피해서 울다가

 

긴긴밤 잔다

 

이 갈며

배부른 꿈꾼다

 

 

 

 

그림으로 가는 사람

 

 

내 모습을 그려 달라 했다

늙은 화가는 캔버스 앞에서 심오해진다

붓을 들고 한참을 밑그림만 그린다

 

나라면 얼굴 먼저 그렸을 텐데

마음을 부러 비껴가기라도 하듯

붓 끝은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의 물결에 이른다

그 위에 난파선 하나, 낡은 집 한 채 떠내려간다

 

썰물을 따라 나도 쓸려 간다

 

저녁 무렵 해안가에 이르면

까치발로 선 채 어른과 키를 재던 어린 내가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나를 그려 달라 했는데

곧은길을 걸어왔다고 믿었는데

화가는 굽은 길을 따라 걸어오는 그림자를

내 뒤꿈치에 닿게끔 색칠한다

 

고개를 젓더니 액자를 옆구리에 끼고

물러나면서 기다란 등을 보인다

 

나는 수첩을 꺼내 당신과

굽은 길과 긴긴 그림자를 만년필로 잇는다

가는 길 외롭지 않게 어깨에

손도 하나 올려 본다 잡히지 않는 당신

 

그려 둔 모래성을 발로 차본다

바닷물이 엎질러진 캔버스엔

한데 뒤섞인 얼굴이 주름져 있다

 

당신인 것도 나인 것도 같다

 

 

 

 

사이키델릭

 

 

눈앞에서 흘러내리는 빙하와 바다, 설산

 

지축이 흔들리는

어느 유배지의 백야를 보며

 

나와 함께 누워

눈에 뒤덮여 얼어 가고 있다

 

나는 이 몽롱하고 졸린 기분이 좋아서

주머니 속 네 손을 잡고 움직이지 않는다

프렌치 키스를 하면서

세상의 종말을 준비한다

 

망토를 두른 태양신의 망나니는

나를 둘러싸 얼굴에 검을 겨눈다

 

그 사람은 죄가 없어요

다 내 탓이에요

 

그래, 차라리 내 눈을 멀게 해 주세요

눈을 찔러 주세요

 

빙하도 수평선도 눈산도

그리고 너도 칼에 난자당해

하얀 피를 쏟는다

 

그 벌어진 틈을 비집고 나오면

일순 집채만 한 소용돌이는

 

어느 아열대 기후의 해안가의 아침

조난된 배 위에

나 홀로 남겨 버리는 것이다

 

너 빼고 다 보이는

장님이 되고 마는 것이다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걷는 사람 시인선 108,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