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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의 시(6)

by 김창집1 2024. 3. 22.

 

 

비밀

    -교환 일기

 

 

  본당 한가운데에는 약사여래상이 있다 우리가 하는 말을 먼저 온 여자가 불상 뒤편에서 숨어 듣는다 여자는 무엇이 무서운지 음울한 곳으로 몸을 숨긴다 살을 파먹는 벌레가 산다는 깊은 숲이 절집을 감춘다 그 여자가 우리가 나눈 말을 모두 부처님 등에 적어두거나 않았을까, 숨겨둔 마음을 내어 말리다가 인기척에 지레 숨은 것뿐일까 비밀이 있는 곳으로, 신이 보지 않은 곳으로 다리가 많은 벌레 하나 기어간다

 

 

 

 

이피게네이아의 꿈

 

 

   “기차에서 내린 단 한 명의 승객은 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누구의 꿈도 아니다”* 부정사가 부정하는 것이 꿈이라기엔 이어지는 이야기가 동화적이에요 거인이 나오고 마법사가 나오지요 문제는 꿈의 소유권이에요 꿈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이라고도, 꿈은 특정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다수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나의 꿈이면서 동시에 많은 여성의 꿈 많은 여성이 함께 꾸는 꿈은 어떤 것일까요? 가령 사령관이 딸을 제물로 봉헌하는 순간 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암사슴이 놓여 있는 꿈, 이피게네이아의 꿈 우리가 이피게네이아가 되는 꿈 이피게네이아가 되어 다시 꾸는 꿈 다수가 같은 악몽을 꾸고 있다면 이 꿈은 단지 꿈일까요, 아니면 지독한 현실일까요?

   (소녀, 쓰러져 있다 핀 조명) 누가 저 소녀를 죽였을까요 몇 명이 저 소녀를 죽였을까요 편지가 온다, 편지가 온다 살해되어 지금 여기에 없는 여성에게서 편지가 온다 도대체 몇 명이 저 소녀를 죽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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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수아 노인 울라에서, 뱀과 물, (문학동네, 2020)

 

 

 

 

첩첩산중

 

 

  여기 나쁜 게 있어요?

   -, 무슨 일이 일어나면 거기에는 어떤 흔적이 남지 내 생각에 이 호텔엔 지난 세월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거 같구나 다 좋은 일만은 아니겠지……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걸 샤이닝 하는 사람은 볼 수 있단다*

 

   오버룩 호텔에서는 끔찍한 일이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잊고 우리는 이곳으로 돌아온다 타자기가 호텔 라운지에서 주인을 기다린다 눈보라의 백서가 첩첩산중의 빈 곳을 채우면서 쌓여간다 산은 우리를 목구멍 안에 넣고 입을 닫는다 우리가 쓴 하얀 편지도 산의 먹이가 된다 오버룩 호텔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호텔은 우리를 삼키고 반추한다 겨우내 눈보라의 고립 속에서 우리는 말하는 법을 잊고 이 방 저 방 쫓겨 다닌다 방만 바꾼다 우리는 먹거나 먹힌다 마음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는다 식인종이 뜨겁게 운다 눈이 덮이면 우리는 쓴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지 못했어도 본다 그 일은 세대가 바뀌어도 일어난다 어두운 유산이다 미로 속에서 타이핑 소리 울린다 눈 위에 쓴 편지는 어떤 밤보다 두껍다 아무도 없는데 많은 발자국, 미로 속에는 우리 마음의 피 묻은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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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리 큐브릭 샤이닝(1980)

 

 

                   *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창비시선 495,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