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트세이버
-준환에게
죽고 싶다며 눈감는 사람의
가슴을 함부로 짓이겨도 되는 걸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그는
잠긴 문 문 너머를 상상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까만 동공에 심어 둔 투시경이
두꺼운 갑종방화문을 뚫는다
젖은 옷이 담긴 세탁기 옆
쏟아진 수면제, 삐뚠 글씨로 적은 비문 가득한 유서, 몇 통의 부재 중 전화……
갈빗대가 으스러지도록
식어가는 사람을 누르며 무표정으로
스스로를 향해
“우리의 인생은 왜, 왜! 이토록 허무한 겁니까!”
다려진 셔츠를 붙들고
단추가 뜯어지도록 외치지 않으면
심장이 멈출까
덜컥 대답을 들어버릴까
손발 구르는 동안
검은 비닐봉지 밖으로 삐져나온
짓무른 귤 두 개
푸른곰팡이 슬고 있다
빨간 십자가
문을 열고 사라진 사람은
소식이 없다
그나저나 이 사람 그때 밥은 먹었으려나
♧ 카운트다운
10
카운터펀치 얻어맞고 튀어 오른 저녁 하늘의 마우스피스가 정지 화면으로 보이는 순간
9
첨탑에선 종소리 울리고 전신주엔 새 한 마리 앉는다 무릎 짚고 다시 일어서라 부추기면
8
흰 수건을 만지작거리던 지난날 어수룩한 내가 죽도록 미워진다
7
찢어지고 부어오른 얼굴, 외눈으로 겨우 보이는 것은
6
늦은 오후께 반투명 통유리를 통해서만 한두 뼘쯤 빛이 드는 방
가느다란 로프를 붙든 채 얼굴을 닦는 벌레 같은 사람아
5
여기요, 여기요, 그래요, 손 흔들고 있는 여기요
4
얻어맞아서가 아니라, 이를 악물어서 아픈 거라며
한번 문 건 놓지 않는 핏불테리어처럼 짖어도
3
얼굴은 사라지지 않고 기어코
닳고 해지기만을 거듭하다 멍들어 간다
2
뭉게구름 한 뭉치 뜯어다 피 묻은 입가를 닦아 줘서 고맙습니다
1
나 잘 살고 있는 거 맞죠?
병든 개처럼 운다
♧ 세화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를 헤쳐 붉은 새가 된 사람을 온몸으로 감싸며
일터에서 다치지 말자 죽지 말자 살아야지
시시로 안부를 묻는 우리는
사람만 생각하고 사람에 우네
울어도 울어도 눈물은
바다가 되지 않네 마음의 불을 끌 수 없네
새가 날아오르도록
불이 타오르도록 놔둘 수밖에는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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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동부소방서 표선119안전센터 故 임성철 소방장을 추모하며.
*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 (걷는사람 시인선 108, 2024)에서
*사진 : 깊은 바다 속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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