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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4)

by 김창집1 2024. 4. 21.

 

 

숨소리

 

 

  내 다섯 개의 손가락 사이로 긴 생머리 휘날리는 락커의 고음의 노랫소리가 통과했다 스멀스멀 호박 덩굴이 마당을 기득채운 어두운 안개를 틈타 아무도 모르게 베란다를 뒤덮었다 드럼 소리에 맞춰 툭툭툭 빗방울이 호박잎에 떨어질 때마다 락커의 사우팅이 들려왔다 처마 밑에서 방울뱀이 방울방울 물방울처럼 떨어진다 방울뱀들은 서로의 흼을 껴안고 구름 속에서 일곱 색깔의 무지개가 됐다 내 뭉툭한 손가락도 무지개로 만들어 졌다

 

  일곱 색깔의 무지개에서 일곱 색깔의 눈이 떨어진다

 

  나는 쌓인 눈을 푹푹 밟으며 아이들과 눈 덮인 무밭에서 썰매를 탔다 내가 만든 발자국은 거대한 욕조 같았다 그리고 아이들의 얼굴도 일곱 색깔이었다 가죽 잠바를 입고 하안 수염을 한 락커가 사우팅을 하며 커다란 발자국 속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 발자국 안에는 따뜻했고 쑥 향기가 가득 했다 어둠속에서 칼을 찬 들쥐들이 락커 주위를 둥그렇게 감싸고 횃불을 들어 빙빙 돌며 인디언의 어떤 우울한 의식처럼 구슬픈 노래를 불렀다 그 의식은 붉은 눈알을 가진 짐승의 숨소리 같았다

 

  락커는 새벽녘 해가 뜨기 전에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가방에 넣고 일곱 색깔의 무지개를 목도리처럼 어깨에 걸치고 안개 속으로 시라졌다 차가운 안개가 됐다

  락커는 입속에 기득 담아 우물거리던 반딧불이들을 후 하며 빛 없는 세상 속으로 날려 보냈다

  햇살 위에 앉아 있던 호랑나비 한 무리를 잡아 바람만 기득한 별 속에 풀어 놓았다

 

  락커의 사우팅은 안개와 부딪쳐 처마 밑에서 방울방울 물방울처럼 떨어진다

  락커의 사우팅은 가끔 영혼 없는 개구리 울음소리 같았다

  또는 축축이 외롭게 내리는 가을비였을까

  락커의 사름에서 피 냄새가 났다

  매일 아침 어둠 속에서 락커의 사우팅이 호랑지빠귀 울음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붉은 구름이 붉은 눈물을 흘린다 고개를 꺾고 마른 나뭇잎 위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기도 올리는 락커, 바닥을 흐르는 락커의 숨소리

 

  내 심장은 아직 흔들리고 있다

  마른 나뭇잎들은 바람에 날려 아직 지상에 떨어지지 않았다

 

 

 

 

당근으로 살기

 

 

  코를 간질이는 향긋한 당근을 먹는다 죽은 사람들의 시간은 차갑고 붉다 향긋하다 당근을 닮았다 그리고 영원한가 거대한 당근을 허리춤에 묶고 안나푸르나를 오른다 거대한 눈 속에 사람들이 두더지처럼 파묻혀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죽은 사람들은 영원해지기 위해 두더지처럼 눈 속에서 거대한 동굴과 길을 만들고 있다 눈 속에 파묻힌 사람들의 심장 속엔 탁상시계가 들어 있다 눈 속에서 재깍재깍 시계소리가 들린다 크레바스를 지날 때마다 기다란 당근을 놓고 그 위로 지나갔다 시간이 얼어서 산등성이를 굴러 다녔다 설인들은 배고플 때마다 아이스크림 같은 시간을 허겁지겁 먹었다 그래서 설인들은 영원히 살 수 있었다 난 배고플 때마다 가져온 당근을 먹었다 당근은 거대해서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다시 눈 속에 파묻힌 죽은 사람들의 시간은 영원한가 그들의 시간을 가위로 오려 모빌처럼 하늘 속 구름에 매달았다 우울한 태양과 가까워지면 그들의 시간은 불타 없어졌다 다시 비가 되고 눈이 되어 지상에 떨어진다 모든 우울한 것들은 마침내 영원해지기 시작했다 난 안나푸르나 정상에 오른다 가져온 당근을 깃발 대신 꽂았다 당근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정상에 오른 감격에 소리치고 뛰어 다녔다 한 개의 당근이 뿌리를 뻗고 죽은 사람들의 시간이 뿌리를 뻗어 당근 밭이 마침내 안나푸르나 정상 한 구석에 생겼다

 

  난 산을 내려올 생각이 없다 거기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간과 영원히 같이 할 것이다 내가 영원해지는 마지막 방법이기 때문이다 난 이 세상의 우울한 사람들에게 당근 하나씩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는다 가끔 모든 것을 버리고 당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삶이 멋있고 아름답다

 

  죽은 사람들의 눈빛은 애처로운 달빛이다

  눈 속에서 마지막 촛불을 켠다

 

 

*'햄릿' 책 표지 삽화

 

 

햄릿의 숲*

 

 

얼어붙은 호수 주위로 거대한 숲이 있다

이 숲을 지나는 사람들의 생각과 붉은 눈빛은 이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이 숲을 지나는 사람들 중 아이들만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숲을 어린 유령의 숲이라 불렀다

숲속으로 눈처럼 떨어지는 하안 생각이라는 것은 거대한 토네이도처럼

자작나무 숲을 우수수 흔들리게 했다

차가운 눈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멈추게 했다

 

햄릿과 햄릿의 붉은 생각은 자정이 되면 마차를 타고 매일 숲을 지나갔다

햄릿의 우울한 생각들은 푸른 늑대들의 갈퀴를 잡고 자작나무 숲을 뛰어다녔다

햄릿은 붉은 생각 속에서 심장을 꺼내 착한 늑대들에게 던져주었다

사라진 아이들의 영혼은 늑대의 붉은 눈알 속에서 반짝였다

 

아무도 이 숲속에서 우울한 생각을 먼저 보여주지 안았다

아무도 착한 늑대들에게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새어 나오는 울음을 호주머니 속에 꾹 눌러놓고

햄릿은 애벌레처럼 몸을 말아 우울한 생각 속으로 들어가 숨는다

햄릿은 햄릿의 우울한 생각이 된다

햄릿의 생각은 겨울밤 자작나무 숲으로 떨어지는 차가운 달빛과 부딪치면 오로라가 된다

 

햄릿은 사라져가는 누군가의 마지막 생각을 심장 속에 감추고

죽은 사람의 영혼 냄새 나는 낙엽이 깔린 적막한 숲길을 달리고 달린다

끝이 없으므로 생각 속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착한 늑대가 하울링을 하며 눈을 감는다 아니 햄릿이 기도를 한다

여 기 살 아 있 다

난 아직도 덜컹거리는 마차 위에서 숨죽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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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햄릿의 숲 : 햄릿의 숲은 TV예능프로그램 제목입니다. 이 예능프로그램 제목에서 힌트를 얻어 이 시를 쓰게 됐습니다.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시와 세계, 2023)에서

 

 

                         *세익스피어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