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시
어느 토요일
오후
들개 바람 불어오는 들판 쏘다니듯
거리를 기웃거리다
중산간 마을에 펼쳐지는 별들의 고향 같은
메밀 집 간판 보고 무작정 들어갔다
하안 소금꽃이 서걱거리는 메밀밭 언저리에서
오랜 시간 숙성된
가늘고 긴 이야기가 이이지는
담백한 메밀국수 속으로
목적 없이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물결 사이에 고여 있는
풍경을 조준하며
왜가리 결음으로
물 위를 더듬는다
돌담 위에 앉아 멍때리는 길고양이처럼
물속을 들여다보노라면
누군가 떨어뜨린
주인 없는 이야기 하나
말갛게 고개를
내민다
♧ 성산포의 아침
- 김용주 미술전 ‘바람 생기는데’를 보고
갈매기들의 날갯짓 소리에
기지개를 켜는 아침
바다의 술렁거림으로 성산포가 밝아온다
긴긴밤 어둠 속에서 날개를 접이
고단한 하루와 뒹글다가
근심과 걱정 다 떨쳐버리듯
부르르 날개를 털며
설렘으로 아침을 맞이한다
바람, 너는 나의 날개
나의 에너지
여행 가방을 챙기듯
바람의 방방을 바라보며
바람을 맞대한다
오늘 다시 바람 앞에 곤두박질치는 순간이 다가와도
더 높이 더 멀리
비상을 꿈꾸며 하루를 시작하련다
오종종 모여든
갈매기들의 피난민 수용소 같은
시끄러운 성산포의 아침은
황금빛으로 밝아오는
희망이어라
♧ 나무로 살아가기
-‘2022년 작은 세상 그 예술의 풍경 선물전’ 강미순 작품을 보고
말을 아끼듯
몸으로 말하는 사람
주홍글씨 같은 침묵을 목에 걸고
모진 세월 버티어왔네
날마다 토해내고 싶은 울분
안으로 삭이며
오롯이
내가 나다움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햇빛과 비와
바람의 사랑으로
인내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으리라
흉흉한 세월 다 보내면서도
잎을 피울 수 있었으리라
가지가 휘어지며 몸이 뒤틀리면서도
누군가의 그늘이 될 수 있었으리라
내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리라
♧ 너에게로
-김경숙 사진전을 보고
기적 소리 같은
파도의 심장 소리 들린다
먼 바다에서부터
숨 가쁘게 달리와
쓰러지듯 엎디어
온몸으로 백사장을
어루만진다
썰물과 밀물 사이에서
짧은 재회를 위하여
뼛속 길이
에로스의 사랑을
고백 한다
물거품처럼 흩어지는
소유할 수 없는
파도 같은 사랑
백사장의 심장을 두드리다 돌아가는
길목에
사랑의 물집 같은
조개껍데기 하나 솟아올랐다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 (한그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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