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라스틱 감정 - 최경은
조각들이 쌓인다
나노플라스틱,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들
조각들은 바쁘다
무한하다
은밀하다
플라스틱처럼 유해한 나를 나는 찾고 있다
나는 왜 유해한가
분노조절 안 되는 폭발적인 감정
외톨이라는 감정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지 않는 무기력을 낳는다
누구에게도 도움 안 된다는 생각이 닿는다
자존감이 움츠러든다
강박 속에 숨어 있으니
감정이 없는 플라스틱처럼 기분이 딱딱해진다
플라스틱처럼 되고 싶은 생각이 밀려온다
감정을 지우고 또 지운다
새들이 추락하고
고래가 떠오른다
감정은 없어도 흔적이 남는구나
더 많이 자잘해져서 사라지기 전에
나 여기 있어요,
소리친다
♧ 바람꽃 - 한명희
넌 바람꽃이 되겠다고 했다
순정이 아슬한 벼랑 위에 걸려 있음을 알았을 때
이미 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몇 굽이 등성이 넘어
어느 골에 뿌리내렸는지
구름의 꼬리만 붙잡고 질문이 하염없었다
명치 끝 통증이 얼마나 아렸을지
낯선 숲의 정적을 산벚꽃이 보듬었을지
그저 생각만 무성해
보이지 않는 별의 궤적을 더듬었다
우연이 도처에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바람결에 실려 온 너의 소식
산사를 품은 또 다른 길을, 길로 걷고 있다는 풍문
속세를 등진 여린 청춘의 아린 슬픔을
다독인 산문에 기대어
무명초 깎아 내고 씻어 낸 마음자리
언젠가 눈망울에 만다라 비칠 때
등 돌린 사랑의 아픔 우담바라로 피어나겠지
♧ 좋아지는 쪽으로 - 황현중
커피를 오래 마시고 천천히 걸었다
하늘에 드문드문 젖빛 구름이 있었고
별은 보이지 않았으나 바람은 선선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덜 벗겨진 구름 틈으로 희미하게나마
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견딜 만했고, 괜찮았고, 좋아졌다
좋아지는 쪽으로 분명 나는 걷고 있었다
허리와 고관절 수술을 하고 회복 중인
아내에게 물었다 괜찮나고
그만하다고 했다
다시 물었다 괜찮나고
어제보다 조금 좋아진 것 같다고 했다
적어도 두 번이어야 한다
한 번이면,
우리의 삶은 고통 속에 그대로 멈추고 말 것이기에
몸이 불편한 아내를 대신해
쓸고 닦고 설거지를 했다
삶은 방치하면 더러워지기 마련이다
더러워지는 것은 어쩌면 죄일지도 모른다
죄를 씻고 닦는 것은
용서받는 일
더러움을 조금 벗겨 낸
방 안이 마치 작은 천국처럼 환해졌다
그래, 괜찮아졌다 좋아졌다
나는 분명, 좋아지는 쪽으로 걷고 있다
♧ 살강* - 김성중
살강, 하면
고향집 대밭이
어릴 적 내가 달려온다
살강 위에 얹힌 그릇 몇 개
식은 보리밥 한 소쿠리
아무리 뒤져도 먹을 것이 없던 시절
한여름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
사카린**을 타서 마시면
행복이 춤추던 시절
살강 위에
오르던 고양이도 없고
괜시리 냉갈***만 흐르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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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엌에서 그릇이나 음식물을 올려놓는 대나무로 엮은 시렁의 전라도말.
** 사카린. 당도가 매우 강한 물질. 한때 발암물질로 사용이 금지되기도 했음.
*** 불을 필 때 나는 연기의 전라도말.
♧ 가을 연가 – 김정옥
연갈색의 갈참나무 잎이
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야야야 비명을 지르곤 했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르고 드넓은 도화지가 되어
마음 가는 대로
그림을 그려 보고 또 그려 보게 했지
서늘한 바람 한 점이
어디선가 날아와
내 귓가에서
가을 연가를 불러 주었지
임에게 전해 달라고
나도 바람에게
사탕 같은 노래를 속삭여 줬지
♧ 미안한 일 – 장우원
개똥을 치우려니
개똥을 부수던 곤충이 도망간다
대못만 한 구멍 속
언제 그런 구멍이 있었던지
언제 그런 곤충이 살고 있었던지
미안한 일
거미줄을 자르려니
줄 타던 거미가 도망간다
몸뚱이 몇 천 배나 되는 공간
하늘이 그리 넓어 보일 수 있었던지
사람 손 그리 험할 수 있었던지
참, 미안한 일
* 월간 『우리詩』 11월호(통권 제437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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