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밤
사람은 떠나가도
동백꽃만 붉게 피어
어제를 증언하듯 형형한 눈빛 하나
말갛게 고인 말씀이 댓돌 위에 놓여있다
퍼렇게 가슴 저린 시간 속을 빠져나와
푸른 이끼 골목길에 담쟁이 뻗어나고
성읍리 조몽구 생가 하늬바람 세 들어 살던
달밤이면 별이 된 아이들이 내려와
마당 한가득 초롱초롱 촛불 켜고
골목길 어귀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린다
오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절규하듯 빈 항아리 한숨들 새 나가고
지붕 위 하얀 달그림자 지문처럼 찍혀 있는
♧ 팽목항에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고개를 떨구다 본
어느새 바다를 지운 아이들이 웃는다
종이배 출렁거리며 섬 하나를 건넌다
♧ 도문에 말하다
폭염 속 푸른 꿈 찾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연길 거쳐 이도백하 장백폭포 천지까지
유람선 나루터 앞에
우두커니 멈춰선
어찌하여 두만강을 마주보기만 하고 있나
얼기설기 얽어놓은 뗏목 위에 올라타면
옷 대신 가슴 한 자락
자꾸만 젖어드는
아직도 독백으로 꿈을 꾸고 있으신가
자유의 것발 아래 민둥산에 봄이 오기를
휴대폰 만지작이다
물결이나 만지작이다
♧ 만주
무성했던 그날의 직립의 끝은 어디일까
자작나무 마디마디 일렁이던 불꽃이여
허옇게 등 곧추세운 나뭇등걸을 보아라
만주의 들판 아래 묵묵히 선 채로
오르고 또 올라도 허기진 하늘 한 뼘
비워서 또 채워지는 그 하루가 너무 길다
♧ 탐라입춘굿
어디서 오는 걸까, 살얼음 얼던 그곳
간절한 것은 늘 한 발짝 앞서 오는가
길 위에 중심을 잃고 놓쳐버린 시간아
계절은 소리 없이 검은 장막을 걷고
원도심 담벼락 사이 따스한 이 온기
어느새 탐라입춘굿 새 철 드는 날이다
일만 팔천여 신들이 다 모여들고
올해의 풍요와 도민의 안녕을 비는
관덕정 낭쉐* 앞에서 환하게 웃고 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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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쉐 : 나무로 만든 소, 탐라입춘굿의 상징물.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 (한그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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