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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시(4)

by 김창집1 2024. 11. 25.

 

지금이 그때다

 

 

뜨는 해 어제와 다름이 없으련만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동쪽으로 가고, 동쪽으로만 가듯이

 

십 대에는 스물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했고

스물에는 서른을 무작정 기다렸고

서른 때는 마흔을 두렵게 기다리며 보냈고

마흔이 되니 헛헛함이란 것이 붙어살았다

 

지는 해 내일과 다름이 없겠지만

무언가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은

서쪽으로 가고, 서쪽으로만 가듯이

 

쉰은 마흔을 되돌아보게 되고

예순이 되니 쉰, 지금이 그때였으면 한다

 

보려는 건 같은데

보려고 하는 건 다르듯이

일흔이 되면 예순을 그리워하리라

 

여든이 되면 더더욱 일흔을 그리워하리라

 

보려는 해는 뜨고

새해, 보려고 하는 붉은 해가 떴다

그때가 지금이다

이 아름다운 오늘들이 최고의 순간이기에

지금이 예순 삶의 첫 날처럼

 

 


 

볕 쬐금 내린 날

 

 

성씨 같은 사람들은 산으로 도시로 죄다 떠났고

성씨 다른 사람들만이 덧댄 지붕을 하늘 심아

설핏한 볕 동무와 옹기종기 모여 산다

 

하늘이 나무 끝에 내려앉은 날

하늘과 같이

눈도 길동무 되어 왔다

 

볕 쬐금 내린 날

볕과 같이

읍내 사는 일곱째 막내아들이 왔다

 

하늘과 눈과 볕

아래

 

장작을 패는 아들이 애처로운

노모

그 장작을 때지 않는 노모가 애처로운

아들

마주한다

 

아들의 아비들은 모두 산으로 가고

아비 의 아들들은 모두 도시로 가고

지팡이 길이만큼 그림자가 줄어가는 아비의 지킴이들만이 남았다

 

 


 

0번 버스

 

 

오늘도, 습관적으로

들어오자마자 텔레비전을 켰다

시골길 달리는 버스가

화면 가득하다

 

경상북도 성주 어디쯤

오늘도

0번 버스가 달린다

할매 버스가 달린다고 한다

 

구불구불 할매들을 실어 나르는 0번 버스

내려주는 곳이 정류소인 0번 버스

동그라미와 작대기로 충분히 살아온 할매들을 위해

문자는 쓸데없고 상형이면 족한 할매, 그네들을 위해

 

그네들의 0번은

(), 중용(中庸)도 아니고

()도 아닌

동그라미, 멀찍이서도 잘 보이는 동그라밀 뿐이었다

 

0번 버스는

계절의 순환처럼 때가 되면 비탈길을 어김없이 내려온다

시는 게 그렇듯, 할매가 타고 내리는 시간이 삶이고

저만치 보이는 버스, 할배를 기다리는 때가 시간이듯이

 

 


 

도마뱀의 양지

 

 

산을 오르기가 쉽지 않아

돌담길을 걷노라면, 가끔

도마뱀 하나가 양지 바른 곳에 자리를 잡은 모습을 대면한다

한참을 서서

그걸 보노라면, 가끔

동네 어귀 양지 바른 벽에 기댄 채

먼 하늘 응시하는 노인네와 겹친다

 

태생이 그래서 햇볕에

제 몸을 덥혔다가 식혔다가를 반복하는 도마뱀

 

화학에너지의 정량을

더 이상 확보하지 못해 모자 쓴 채 햇볕을 미주하는 노인네

 

 


 

세상을 읊다

 

 

눈 속 매화는 빙자옥질 매화찬인데

봄꽃 매화는 시큰둥 너로구나

제 모습 제 의미는 어디에나 있을까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월간문학 출판부,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