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다래 – 윤순호
바람 세수가 맑게 끝난 하늘을
숱 좋은 초록 이파리로
칙칙하게 가리고
치렁치렁 얽힌 떨기 부지하느라
삼복에 목도 말랐겠다
연신
도란거리는 좁은 계곡으로
쭈뼛쭈뼛 발을 내밀고
더러는
허공을 휘젓는 두 팔로
소나기도 부르더니
그거였구나!
초조해 하던 네 속셈이
초록 열매로 가을을 익히는 일
♧ 빼앗긴 여름 - 이범철
-여름을 배우는 학교에서
매미가 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울음만으로 여름을 읽는다
하늘 찢어져라 울다가
짧은 명줄 탕진하는 줄도 모르고 운다
밤낮으로 울어야 마침내 가을 올 것처럼
매미에게 여름은 오직 울음뿐
울음이 지고 나면 매미는
울음이 다 빠져나간 몸
나무에 걸어 둔다
제대로 한번 매미처럼 울지도 못하고 살아온 나
여름마저 빼앗겼다
어떻게 울어야
내 몸 저리
손끝 발끝까지 비어지는 것이더냐 손끝,
발끝으로까지 울 수 있는 것이냐
♧ 무책임 - 이상욱
오늘이
문을 닫는다
이름을 어제라 고치고
내일을 열어
오늘이라 한다
갈아타기 하는 것을 모를 것이라
지난 것은 과거라며 얼버무린다
지새는 이 밤
새벽은 멀기만 한데.
♧ 서우봉 해변에서 - 이수미
발길 따라 걷다 보니 해변가였습니다
갯바람에 실려 온 비릿한 내음이
당신 체취를 느끼게 해 나도 몰래 휘청댔습니다
서우봉 해변의 에메랄드빛 물감으로 물들며
손만 잡고 있어도 꽃처럼 살며시 피어나던
그때의 당신 앞에 다시 설 수 있다면
어색하지만 수줍은 미소도 살짝 보여 주고
당신 품에 살포시 안기고 싶습니다
그때쯤이면 아파트 화단에 철쭉도
무겁게 짓누르는 마음에 빗장을 풀어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 누나 생각 1 - 이학균
제비꽃 흐드러진 저 강둑에
짧은 손내밈도 못하는 허망한 삶
아직도 분 냄새 가지 않은
바느질 그릇 속의 꿈은 깊은데
젖은 눈시울 훔치는 바람에
일기장을 붙잡고 써 보는 이름이 촉촉이 젖는
문득, 새벽 두 시의
어둠을 밟고 오는 누나 생각
* 월간 『우리詩』 11월호(통권 제437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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