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식주의자
내 안의 짐승을 길들이기 연연함에
남은 생 봄과 이슬, 풀잎 상처 더하여
새김질 초식의 향기 그 또한 짐승이 되리
♧ 동행
함께라는 너의 말
애써 외면했는데
기어코 눌러앉아
가을 귀를 얹히네
쯔쯔쯔 풀벌레 소리
빈집에 들어찼네
♧ 진위
스치듯 만남에도 궁금한 이유 있어
고향이 어디예요, 이곳 사람 안 같아요
한참 후 촌스럽다는 말뜻,
‘내 마음의 낯섦’이다
벼린 풀 다 눕도록 베인 손도 아물어
쭉정이 바싹 마른, 숨겨둔 마음 언덕에
섬 억새 가을볕 들녘
그림처럼 들여놓다
♧ 우포늪
새벽은 안개 속에 무엇을 숨겨두었는지
자꾸만 헛짚는 희미한 늪의 그림자
기꺼이 내어주는 등 불쑥 업히고 말아
젖은 땀내 익숙히 걷어내는 물안개
젊은 날의 어머니 창포물 게운 입덧에
저 흡반 끌려 들어가 뜨거운 중심 이다
물풀의 일렁임 같은 아이들의 발바닥
비로소 보이는 세상의 꿈틀거림에
암호를 풀어헤치는, 오래된 그녀의 속곳
♧ 목차에 빠진 저녁
버리기 아까워서 붙여둔 시가 있다
작은방 열 살 벽에 단물 빠진 껌처럼
까맣게 얼룩지도록,
질근질근 잇몸에 낀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 (가히,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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