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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완)

by 김창집1 2024. 12. 24.

 

 

 

레몬 C

 

 

  생각만으로 나를 깨우는데

  우리, 사랑한 적 있나요

  미안하지만, 전 당신을 기억하지 못해요

 

  이국적인 당신

  자세히 봐도 되나요

  자세히 본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서 본다는 거죠 멀리서 훔쳐보듯 쓸적쓸적 보는 게 아니라 분석하며 오래 본다는 거죠 당신을 만질 수도 있고 벗길 수도 있고 자를 수도 있어요

 

  당신은 꽤 강렬해요

  코를 찡하게 몰고 와서는 진저리를 치게 절정으로 몰고 가요 전혀 대비하고 있지 않다가는 내가 노랗게 무너질 것 같아요

그러나 나에 대해서 미리 단정 짓지는 말아요. 순진하다고 해서 당신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쓴맛 단맛 다 알아요

 

  레몬 C, 침이 도네요

  혓바늘이 돋았어요

  지난가을 한 소쿠리 레몬

  호주 벌꿀에 재워진 당신

  아직도 사랑이 익지 못했나요

  이 쓴맛으로는 도저히 입술을 훔칠 수가 없네요

 

 


 

청둥오리를 보았을 때

 

 

강을 유유히 떠다니거나

머리를 박고 사냥하는 청둥오리만 보다가

둑방 마른 풀숲에서 풀씨를 쪼고 있는

청둥오리를 보았을 때

바람 부는 바닷가를 배회한

어느 날의 일탈을 생각한다

 

빛나는 녹색 머리에 노랑 부리의 수컷은

자맥질로 지친 하루를 잠시

무리를 떠나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모른다

매끄럽게 수면을 떠다니다 문득

살찐 몸뚱이를 뒤뚱거리며

땅을 걷고 싶었는지도

 

흙냄새를 맡으며 마른 줄기에 달린 풀씨와

멀리멀리 함께 여행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운 이 생각하며 혼자

울고 있었는지도

아무도 모르게

햇살 밝은 강가 윤슬이 반짝이는 날은

홀로 떠나고 싶은 날도 있는 것이다

 

 

 

 

목련이 꽃 피는 찻잔

 

 

꽃은 봉오리로만 건재하다

속에 묻고 있는 생각까지는 나야 알 수 없는 일

 

달콤하거나 쓰거나 쌉쌀한 맛이

수많은 입술이 겹치며 꽃잎으로 스며든다

찻잔의 단단한 뼈로 자라

꽃을 피우고 있음을 여태 난 모르고 있었다

봉오리는 계절을 알 수 없으며

순환의 일과로 기록되지 않는다

하안 목련은 연갈색 문양으로 눌려

층층이 박혀 있는 눈[]으로 말한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밤을 지나

새벽까지 품고 아침 햇살이 된다는 것을 놓쳤다

피지 못하고 화석 이 되어버린 꽃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향기가

어질어질한 머리에 흔적으로 남는다

두툼한 머그잔보다 얇은 커피잔이 입에 착 달라붙는다

수만 번의 입맞춤으로 잔의 역사는 꽃으로 기록된다

찻잔에 드리워진 반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경배하듯

손잡이가 꽃받침으로

한 송이 하안 목련이 피어난다

 

 


 

뒤로 전진할 때

 

 

마주 서기 민망해서

만원 엘리베이터를 맨 나중에 탈 때

뒤로 돌아서 탄다

복잡한 전철 안에서 서로 얼굴이 맞닿을 것처럼

가까워질 때 돌아선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전철을 타려고 하다 앞바퀴가 걸린다

뒤로 뺐다가 전진

그러나 다시 걸린다

당황해 멈칫거릴 때 누군가 다가가

휠체어를 뒤로 돌려준다

휠체어의 앞바퀴는 작고 뒷바퀴가 크다

서툰 조종으로 앞으로 탈 때

 

딱 맞게 앞바퀴가 사이에 끼어 버렸다

반드시 앞으로만 전진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밤마다 누워 내일로 전진한다

 

 


 

일기장에 남은 세월

 

 

칠순 날에

한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한 사람은 지구의 언어를 쓰지 않는 곳으로

오직 혼자만의 길을 떠나버렸다

 

영원히 보내는 의식을 치르는 우리는

그 슬픔에서 가벼워지려고

슬며시 눈을 감는다

감아도 떠오르는 건

어렸을 적의 그 단발머리

 

요즘은 이른, 일흔의 나이라지만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닌

퉁퉁 부어오른 얼굴에 생명줄을 걸고

다른 얼굴을 하고 누우니 있던

구석진 그늘이었다

 

어디에서도 맑았던 눈동자와 마주칠 수 없고

구르는 목소리를 가질 수 없다

기억 속에 엷은 낱장으로 묶여

일기장에 남는다

 

뛰놀던 푸른 들판에는 검은 강물이 흐르고

수없이 가지를 뻗던 나무는

고목이 되어 옹이만 박혀

약한 바람에도 몸을 가누지 못한다

 

한 사람이 가면 모두가 흔들리고

서로 손을 잡아보자는 말에 힘이 없다

파장罷場에 남은 사람도

일기장에 세월을 헤아리는

다른 얼굴을 한

또 한 사람이 된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서정시학,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