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야, 세노라 사바사 가르시아의 초상 - 김종욱
가을 낙엽처럼 물든 갈색 곱슬머리로 가린
이마에 드리운 서늘한 그늘,
유럽의 호린 하늘처럼 짙은 눈동자 속에서
조용한 격정도 감지하지 못하고
점잖은 척 교양 있는 체하는 사람들은
단언컨대 교양의 불구자*일 뿐이다
정신이 늙은 자들
그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모른다
뜨거운 여름 동안의 괴로움
타오르고 사그라들어 재로 식어가는 영혼의 빛을
한 점 티 없이 시린 피아노 소리 울리는 맑은 피부
뜨거울수록 도리어 한없이 차가워져서
만질 수도 없이 슬픈 음악의 굳게 다문 입술을
---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中
♧ 귀를 달래다 – 박구미
산수유꽃이 환한 공원을 돌고 도는데
귀가 막혀서 먹먹하더니
뿌지직거리는 소리가 나
눈썹 치켜뜨게 하는데
까만 구멍 속으로 꿈에서라도 듣고 싶은 소리 귀담아듣지 못한 소리 흘려보냈어야 할 소리 눈물부터 나을 소리 한숨 나는 소리 소름 돋는 소리 숨 막히는 소리 간지러운 소리 다정한 소리 그리운 소리 거친 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크고 작은 수많은 소리, 삼키지 않고 토해 내고 있다 탈이 났거나 화난 게 분명하다
침묵으로 익어 가는 봄밤
노랗게 귀 기울이는 중
♧ 낙화 – 송준규
층층시하 혹독한 시집살이와
칠 남매 건사해 모두 출가시키느라
허물만 남은 새우등
팔순의 충주택 밀차 위에
떠억 버티고 서 있는
말티즈 한 마리
수년 전 바람 맞고 쓰러져
성한 곳 하나 없다는데
태워 모시는 대신
지가 타고 다니는 버르장머리
그래도 늠름한 자태 때문에
장군이 이름 얻었단다.
땟국물 쭈르르 흐르는 녀석
함께 산 지 십년이라
사람 나이 칠순에 심장병, 노환 겹처
이젠 같은 노인
살기 위해 녀석 태워 운동한다지만
둘 다
치료도, 희망도 끝나고
온 곳 모르듯, 갈 곳 몰라도
환승 열차를 기다리는 듯하다
향기만 남기고 떠나는 낙화
시든 한 송이
고달픈 생애가 세월 바람에
구부정구부정 떠밀려간다.
♧ 아내 맞추기 –민구식
아내가 입을 열면 나는 귀를 연다.
두 시간 정도는 꼼짝도 않고 들을 줄도 안다.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끄덕끄덕, 맞아 맞아, 그래서 우찌 됐는데?
맞장구를 칠 줄도 안다.
아내가 부르면 발이 먼저 간다. 물론 대답을 크게 한다.
아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나는 지갑을 바로 연다.
맛이 어떠냐고 물으면 무조건 맛있네라고 크게 대답한다.
몰래 소금을 더 넣기도 하지만 가능하면 그냥 먹는다.
이 옷 하고 저 옷 하고 어때? 하면
둘 다 좋네 라고 말하지 않고
파란 옷은 젊어 보이고, 분홍 옷은 예뻐 보이네
라고 대답할 줄도 안다
사십오 년을 넘겨 살고서 배운 지혜이다.
*월간 『우리詩』 12월호(통권 제438호)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월문학' 2024 제15호의 시(6) (1) | 2024.12.28 |
---|---|
'제주시조' 2024 제33호의 시조(5) (0) | 2024.12.27 |
최기종 시집 '만나자'의 시(6) (3) | 2024.12.25 |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완) (1) | 2024.12.24 |
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8) (0) | 2024.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