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 산 –문용진
흰 캔버스 위에 새겨진 고요
하안 숨결이 산을 감싸 안고
온 세상이 잠든 듯하다
높은 봉우리도 낮은 골짜기도
하안 옷으로 갈아입었다
녹음이 짙었던 여름의 기억은 저만치
시원한 물소리도 잠시 숨을 고르고
순수한 마음만 남았다
눈송이들이 수놓은 나뭇가지
새들도 침묵하고 있다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하안 캔버스 위에 붓을 대고
마음껏 그림을 그린다
겨울 산은 순수한 시 인의 작업실
오늘도 나만의 그림을 그린다
♧ 문전 초상화 – 백용천
추석날은 방문요양원이 쉬는 날이다
일어나 보니 구십 넘은 어머니는
숨겨놓았던 밥통까지 찾아내
쌀을 불린 채 문전상에, 냉동 생선은 그대로 올려놓았다
“올해는 가짓수가 적습니다 내년에는 많이 올리겠습니다”
시집와 시아버지 모시라 술로 노래하던 남편을 여의고 다섯 자매를
키운 어머니
복숭아 같던 처녀 손등이 짐승이 긁은 복숭아 씨,
업드려 절할 때마다 몸빼 바지에 흩어졌던 화려한 구름이
모인다
두 손바닥이 하늘을 향해 펼친다
오래된 석상이 깨지듯 어깨가 새 등지를 튼다,
산에서 땔감을 지고 날랐던 널찍한 등 오름,
일어선다,
‘가신 손님, 시아부지, 남편, 아들 있으니 잘 봐 줍서’
겨울 갈대처럼 군데군데 머리칼이 모여 있다
몸만큼 한 다라이를 지고 날랐던 험난한 길이 새겨져 있다
형광등 밑, 얼굴빛이 하얗게 흐른다
수많이 다녔던 눈물길이 수없이 이어져,
다시 그 길로 돌아가는 중
♧ 벌랑 바닷가 – 김미량
동쪽 하늘 언저리에 걸렸던 먹구름
삼양 벌랑 바닷가 하늘에 걸렸다
유유자적 수영놀이 평화롭던 물오리들
사람들 발자국 소리에 놀라서
파드득 하늘로 비상한다
하늘과 바다가 하나 되는 빗줄기
작은 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꼼작거리며
거닐 것 같은 작은 카페
짓눌렸던 일상이 하늘 향해 날아오른다
카페 한편 바다를 향한 상념
끝없이 걸어가는 험한 언덕과 수풀
가시밭길과 고운 황톳길
아스팔트에 닦은 꽃길
결핍에서 충족으로 넘어가는 순간들
긴 여정에 문득문득 찾아드는 상념
삶을 이어가는 선물
♧ 수국의 입성 – 김정희
장마가 지나가는 날
여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끝내 떠나는 이웃을 보며
떠나야겠다고 결심이라도 했는지
준비를 서두른다
미처 뒷정리를 못하고 가면
보기 싫다고 수군거리는 게 싫어서
궷문을 열고 옷을 정리하시네
수많은 파란 나비가 날아와 앉았다
싱싱한 물이 떨어질 것만 같다며
파란 옷이 좋다고 웃었다
저리 많은 나비가 떠나지 않고
어머니가 되었다
♧ 비 오는 날의 수채화 – 김항신
비님과 바람 해와 이슬이
훍 위를 밟으며 싱그런 그림 그린다
어제는 바랭이 오늘은 쇠비름
사실 알고 보면 자연의 법칙
알아서 무쳐 먹고 데우치고
무릎에 좋고 관절에 좋은 것들
우주에서 내려준 벌칙으로
하늘이 주는 어제와 오늘의 것들
흔하디흔한 것들은 게으름,
귀찮음의 법칙으로 걸러내고 버려지는
행위의 수채화 나만의 수채화
네와 내가 뼈들의 아픔을 공생하는
물 흠뻑 그리워 회귀하는 생의 시앗들
*한라산문학동인회 간 『한라산, 보길도를 걷다』 2024 제37집에서
*사진 : 겨울 한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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