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소한 진리 – 여국현
숲 속의 새를 날아 잡아 가둘 수 없어요
새를 부르는 것
내가 숲이 되는 길뿐이지요
자유로운 그대를 사랑으로 옥죌 수 없어요
그대를 사랑하는 것
내가 사랑이 되는 길뿐이지요
바람의 노래 시를 마음만 뻗쳐 품을 수 없어요
시를 품는다는 것
내 삶이 시가 되는 길뿐이지요
♧ 죽음의 능력 – 나금숙
너는 나비가 든 병을 내밀었다
한때 화려했던 날개를 접고
고요하게 정지된 제비호랑나비는
즐겨 듣던 에피타프, 긴 노래를 생각나게 했다
병 속에 고인 침묵이 노래를 따라 흔들렸다
박제된 죽음이
복제되는 순간
잿빛 하늘을 환기시킨다
손을 들어 하늘을 커텐처럼
끌어내린다
융단같이
저기가 여기에 펼쳐진다
천막 안 깊디깊은 곳,
단지 속에 감춰진
작고 희고 둥근 씨앗에도 미열이 난다
♧ 슈 꼬레아 – 나병춘
카슈미르 스리나가르 호수
잘생긴 청년과 말을 나눈다
고맙다는 말이
어떻게 되느냐 물으니
슈 꼬레아란다
슈 꼬레아
우리나라 이름
슈 꼬레아
고맙다는 슈 꼬레아
멀리 타향에 왔더니
더욱 고향 산하가 그립다
고마운
꼬레아
나의 모국어
♧ 소설 즈음 – 남대희
개울가 풀들 누웠고
지난여름 기억들 애써
일으켜 세운다
입동이 지났으므로
마를 것들은 다시 몸을 눕혔다
햇살이 물 위에 누워 한번씩
손가락을 튕겼다 접는다
그 위로 물까치 그림자
슥
지나간다
♧ 겨우살이 꽃 – 이범철
겨우살이, 꽃을 본 일 없지만
오늘도 그 꽃 보러 맨발로 가네
몸 그대로 꽃인 겨우살이 겨울이 없네
봄부터 가을까지 다 겨울이네
꽃피는 봄 무성한 여름 낙엽 지는 가을까지
진한 초록으로 꽃을 피우네
마음이 심란할 때 변함없는 그 꽃 보러 산에 가네
산길 언저리 나뭇가지 뻗은 하늘 끝에서
언제나 피어 있네
언제부터 나뭇가지 위에서 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빛을 잃은 검은 참나무 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버티는 건
겨우살이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네
믿음이 언젠가는 꽃을 피운다는 걸 알기 때문이네
너의 가지가 나에게 뿌리가 된다는 것
가지에게 꽃이 되기로 했기 때문이네
껍질이 다한 나무는 믿기 때문이네
어디든 가서 꽃이 되려거든
겨우살이처럼 살면 되네
*월간 『우리詩』 2월호(통권 제440호)에서
*열매 달린 겨우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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