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시(13)

by 김창집1 2025. 3. 7.

 

 

 

까치밥의 기도

    -세례를 받으며

 

 

올해도 새싹이 피고

그 새싹이 하늘을 맞이합니다

꽃이 피고 열매도 맺습니다

 

많은 열매들이 기도합니다

하늘과 가깝게 높은 가지에 매달려

당신의 빛을

많이 받으며 잘 익어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작은 열매가 기도합니다

늦게, 아주 늦게 태어나 몸도 작고

다른 나뭇가지와 잎새에 가리지만

가끔씩이라도 당신의 참빛을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어진 농부마저도 눈빛조차 주지 않아

수확의 바구니에 담기지 못할지라도

당신과 그만큼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어서 더 행복합니다라고

 

당신의 은총을 기다리며

가장 나-중까지 당신을 만날 수 있어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아닙니다

주여,

때가 되어 마른 가지에 까치밥처럼 남겨져

마지막까지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머금어 빨갛게 익은 채

이름 모를 새들과 벌레들에게

제 몸을 스스로 내어주는 열매이게 하소서

다 내어준 후

마지막 씨앗마저 떨어져 땅에 묻히고

다시 참빛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러하기를 기도하게 하소서

 

주여!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오고 흰 눈이 내리리니

다시 올

온 세상이 당신의 뜻처럼 이루어지소서

 

 


 

참 공평하다

 

 

퇴직을 하고 나니

마음의 시간이 풀렸다

시일월년 흐름이 상관없는

넉넉한 여유도 생겼다

 

훌훌 털고 떠났다

 

그 자리에서

막걸리도 커피도 마셨다

그러나 몸의 시간이 지났다

참기 힘든 배출의 강요를 이길 수 없다

 

참 공평하다, 산다는 게

 

 


 

불두화(佛頭花)

 

 

가을이 깊어도 백당나무

붉은 열매를 가질 수 없고

꽃 속에 꿀이 없으니

벌 나비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 무성화(焦性花)

 

사월 초파일

온몸으로 꽃 공양 올리며

대웅전 앞뜰

새하얀 뭉게구름 부처님 머리로 피어나는 불두화

 

연초록 빛깔에서

눈부시게 하얗다가

연보랏빛으로 변하니 제행무상

낯선 사내에게도 휘어져 절하는 그대에게 나도 합장

 

 

 

 

마음속에 흐르는 별

 

 

섣달 어느 날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주님의 선물처럼 놓인

마음속에 흐르는 별을 찾아

 

서성이는 발걸음은

하얀 빛 용수성지로

기도처럼 향하고

거친 숨소리는

잿빛 당오름을 오르며

굵어지는 제주 바람과 마주한다

 

해거름 지나 해넘이

한기와 허기를 잊은 채

부지런한 바늘이 달린다,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을

 

묵은해 넘기는

자구내 포구 겨울 바다는

기울이 되어

내 미음 비칠까 잠깐 망설였던

또 한 해를 몰아가

빛의 길을 내준다

 

마음속에 흐르는 별이 된 나는

땅거미를 영알길 지층 암석처럼 묻어두고

붉은 해를 맞으러

동으로 간다

 

 


 

꽃만 꽃이더냐

 

 

꽃 피는 봄날이 왔다

전농로에 벚꽃이 피었다

이맘때면 여지없이 벚꽃 축제가 열린다

하늘 아래 사람들은 모두가 예찬을 터트린다

쳐다보는 하늘에서는 핑크빛 빗소리도 내린다

 

하지만

얼마 없어 스러지고 잎들이 돋아나면

하늘 아래 사람들은 땅 위로 돌아온다

자동차들이 거친 호흡, 내뱉는 한숨들이 뒹군다

그래도 벚나무는 이들을 주워 먹고

길 양쪽으로 푸른 기운을 이어준다

 

그들만의 환희로 무성한 잎을 키우고

우리들의 그늘을 만든다

환호의 소리나 감사의 손짓도 없는데도

무관심 속 그늘을 내려준다

잠시 쉴 만한 푸르름

다소곳이 남 얘기를 들어주는 그늘

꽃만 꽃이더냐

묵묵히 서 있는 나무, 자신을 내어주는 그늘

그들이 꽃이고 하늘이어라

 

아직 피어나지 못한 것들에게서,

눈길조차 주지 못한 숨겨진 것들에게서,

느린 흐름으로 철 있는 것들에게서,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것들에게서,

파란 하늘을 본다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월간문학출판부,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