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까치밥의 기도
-세례를 받으며
올해도 새싹이 피고
그 새싹이 하늘을 맞이합니다
꽃이 피고 열매도 맺습니다
많은 열매들이 기도합니다
하늘과 가깝게 높은 가지에 매달려
당신의 빛을
많이 받으며 잘 익어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작은 열매가 기도합니다
늦게, 아주 늦게 태어나 몸도 작고
다른 나뭇가지와 잎새에 가리지만
가끔씩이라도 당신의 참빛을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어진 농부마저도 눈빛조차 주지 않아
수확의 바구니에 담기지 못할지라도
당신과 그만큼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어서 더 행복합니다라고
당신의 은총을 기다리며
가장 나-중까지 당신을 만날 수 있어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아닙니다
주여,
때가 되어 마른 가지에 까치밥처럼 남겨져
마지막까지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머금어 빨갛게 익은 채
이름 모를 새들과 벌레들에게
제 몸을 스스로 내어주는 열매이게 하소서
다 내어준 후
마지막 씨앗마저 떨어져 땅에 묻히고
다시 참빛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러하기를 기도하게 하소서
주여!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오고 흰 눈이 내리리니
다시 올
온 세상이 당신의 뜻처럼 이루어지소서
♧ 참 공평하다
퇴직을 하고 나니
마음의 시간이 풀렸다
시일월년 흐름이 상관없는
넉넉한 여유도 생겼다
훌훌 털고 떠났다
그 자리에서
막걸리도 커피도 마셨다
그러나 몸의 시간이 지났다
참기 힘든 배출의 강요를 이길 수 없다
참 공평하다, 산다는 게
♧ 불두화(佛頭花)
가을이 깊어도 백당나무
붉은 열매를 가질 수 없고
꽃 속에 꿀이 없으니
벌 나비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 무성화(焦性花)
사월 초파일
온몸으로 꽃 공양 올리며
대웅전 앞뜰
새하얀 뭉게구름 부처님 머리로 피어나는 불두화
연초록 빛깔에서
눈부시게 하얗다가
연보랏빛으로 변하니 제행무상
낯선 사내에게도 휘어져 절하는 그대에게 나도 합장
♧ 마음속에 흐르는 별
섣달 어느 날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주님의 선물처럼 놓인
마음속에 흐르는 별을 찾아
서성이는 발걸음은
하얀 빛 용수성지로
기도처럼 향하고
거친 숨소리는
잿빛 당오름을 오르며
굵어지는 제주 바람과 마주한다
해거름 지나 해넘이
한기와 허기를 잊은 채
부지런한 바늘이 달린다,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을
묵은해 넘기는
자구내 포구 겨울 바다는
기울이 되어
내 미음 비칠까 잠깐 망설였던
또 한 해를 몰아가
빛의 길을 내준다
마음속에 흐르는 별이 된 나는
땅거미를 영알길 지층 암석처럼 묻어두고
붉은 해를 맞으러
동으로 간다
♧ 꽃만 꽃이더냐
꽃 피는 봄날이 왔다
전농로에 벚꽃이 피었다
이맘때면 여지없이 벚꽃 축제가 열린다
하늘 아래 사람들은 모두가 예찬을 터트린다
쳐다보는 하늘에서는 핑크빛 빗소리도 내린다
하지만
얼마 없어 스러지고 잎들이 돋아나면
하늘 아래 사람들은 땅 위로 돌아온다
자동차들이 거친 호흡, 내뱉는 한숨들이 뒹군다
그래도 벚나무는 이들을 주워 먹고
길 양쪽으로 푸른 기운을 이어준다
그들만의 환희로 무성한 잎을 키우고
우리들의 그늘을 만든다
환호의 소리나 감사의 손짓도 없는데도
무관심 속 그늘을 내려준다
잠시 쉴 만한 푸르름
다소곳이 남 얘기를 들어주는 그늘
꽃만 꽃이더냐
묵묵히 서 있는 나무, 자신을 내어주는 그늘
그들이 꽃이고 하늘이어라
아직 피어나지 못한 것들에게서,
눈길조차 주지 못한 숨겨진 것들에게서,
느린 흐름으로 철 있는 것들에게서,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것들에게서,
파란 하늘을 본다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월간문학출판부,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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