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빗소리 – 이범철
창문 넘어오는 빗소리 가슴을 두드린다
색깔 고운 소리에 잠을 깨어 창밖 수북이
어깨 부딪치며 굴러가는 소리 줍는다
여름날 한때 먼먼, 잊어버린 이름 데려와
내 고인 턱 아래 놓고 갔던 소리의 말들
때로 날아가 버릴 듯 부풀어 오르던 내 가슴
젖은 습자지 같은 빛깔로 적시며
가라앉혀 놓던 소리의 물결들
여름 지나 가을 드니
붉고 노란 얼굴로 말하고 있다
저 둥근 소리 손바닥 가득 주워
가슴의 빈 주머니 채워 돌아온다
가을을 지나가는 이여
고개 들어 빗소리와 마주 앉아
지나쳐 버린 아쉬운 이야기를 밤새 쓰자
낡고 바랜 신발을 신고 거리에 서서
색색의 가을 빗소리를 밟으며 걷자
수풀 쌓인 무너진 길을 가만가만 걸으며
발등으로 오르는 빗소리를 바라보자
내 쓸쓸해진 가슴이 붉어질 때까지
우산도 없이
걷고 걷자
♧ 봉정사 물고기 - 김혜천
물살 세기로 이름난 진도 울돌목
허리에 두른 밧줄을 다리 기둥에 묶은 어부가
바닷물을 거슬러 솟구쳐 오르는 숭어를
뜰채로 잡고 있다
“잡힌 물고기 배를 갈라 보면 내장이 텅 비어 있어요”
높이뛰기의 제왕도
세찬 물살을 뛰어넘기 위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배설만 한다
대양을 헤엄치던 푸른 욕망도
무엇이 되고 싶던 질주도
자본의 쓰레기도 다 게워 냈다
기억을 지우려고 내장을 긁어냈다
하얗게 비운 결의
갈기 세운 허공에 은빛 목어 한 마리
비워 낸 공간에 햇살 환하다
♧ 떠나가는 가을 – 김정옥
홑잎나무 정수리가 훤하다
점점 더 벗겨져서 주변머리만 남았다
빨간 머리 앤 같은 색깔이 노인처럼 쇠해 간다
이 가을도 간다
엄마는 달리고 싶은 철마처럼 멈추었고
이 가을도 고속열차처럼 달려간다
노란 나비 같은 은행잎이
바람을 따라 난다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가을이 늙어 가고 있다
주름이 늘고 있다
길바닥 가운데에 앉아 있던 엄마
엄마가 저 앞길 가운데 앉아 있다
넓은 길 놔두고 조붓한 골목길로 들어선다
엄마네 집 앞으로 지나온다
주말마다, 일주일에 몇 번식 드나들던 그 길
이제는 갈 일이 없는
♧ 길 – 신경림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을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 조금만 더 가면 집이야 – 나금숙
당신의 말씀 한 마디에 매달리고 싶었다
어릴 때 겨우 기어 올라가 앉아 있던 나무 등걸처럼
당신의 한마디는 나를 답싹 안아 올렸다
멀리서 오는 봄기운에
냉이가 흙속 살얼음을 뚫고 올라오듯이
조금만 더 가면 집이야
집에 가면 우리가 있어
타 버린 둥지를 떠난 산새처럼
너무 멀리 나갔던 우리를
불러들이는 그 말
우리 집!
오냐 금숙이 왔냐
탱탱한 묵무침이 있고 김치전이 있고
솥뚜껑에 돼지기름으로 부쳐 주시던
찹쌀부꾸미
제상에서 젤 맛있던 그 맛으로
끝도 없이 가라앉던 우리를 일으키는
그 한 마디
왔냐∼∼!
지금은 멀리 가신 엄마의
여전한 반색
다정한 한마디에 나를 걸어 보네
*월간 『우리詩』 2월호(통권 제440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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