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과 계곡이 아름다운 마을
‘130여 가구에 3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어음1리는 부면동, 계원동 등 2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감귤과 수박, 양배추, 브로콜리가 많이 재배되는 어음1리는 고지대에 위치한 특성상 타 지역보다 작물을 늦게 수확하고 있습니다. 마을 명소로는 공세미 샘물과 수령이 400년 이상 된 팽나무가 있습니다. 숲과 계곡이 아름다운 마을 어음1리입니다.’
마을 홈페이지 첫 번째 나오는 ‘마을소개’다. 마을 명소로 꼽았던 공세미 샘물을 내세워 밭담길 이름을 지은 것을 보면, 제주 중산간 마을에서 샘물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해 왔는지 알 수 있다. 밭담길은 어음1리 사무소를 기점으로 부면동 세거리를 돌아 북쪽으로 본향당, 수용거리 팽나무와 공세미 터, 그리고 금성천을 따라 남쪽 계원동을 돌아 뒷세미를 거쳐 다시 부면동에 이르는 약 3.8km의 거리로 55분 정도 소요된다.
□ 부면동과 마을 설촌 유래
어음1리 사무소에서 안내 캐릭터 ‘머들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출발한다. 얼마 안 가 팽나무 쉼터가 나타나는데, 부면동이다. 버스 정류소에 나타나 있어 부면동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제주버스터미널에서 291번이나 292번 버스를 타면 이곳을 지난다. 부면동은 계원동과 함께 어음1리를 구성하는 동네지만 마을 설촌 유래는 바로 부면동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문씨 할아버지와 송씨 할머니가 맨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금슬 좋던 부부였는데 사소한 오해로 남편이 집을 나가게 되었고, 할머니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의미로 ‘부면이(夫面伊)’라 했다는 애틋한 전설이 흐른다.
이후 가구가 점점 늘어 김해김씨 집성촌이라 할 수 있었는데, 이후 다른 성씨도 계속 입주되면서 1930년대에는 180가구에 이르렀다. 1948년 4·3으로 인해 전가구가 인근 해변마을로 소개(疏開)되었다가, 1949년에 재건된 후 현재는 96가구가 살고 있다.
□ 본향당과 오솔길
때마침 피어 하늘거리는 닥풀 꽃을 보며 팽나무 쉼터를 돌아 북쪽 농로로 접어든다. 주변은 콩밭과 이제 막 심은 양배추, 브로콜리 밭이 이어진다. 이어 납읍리 천덕로에서 이 마을로 이어지는 큰 어음3길과 마주한다. 그 길을 통해 마을로 조금 들어간 곳 팽나무 쉼터에서 농로로 접어드는 길가에 ‘머들이’가 서 있다.
‘본향당’은 팽나무가 늘어서 있어 쉽게 찾으려니 했는데, 과수원으로 가 보아도 입구가 없다. 본향당 본풀이의 내용은 마을 설촌 유래와 연결되어 있는데….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한 맺힌 세월을 보내다 세상을 떠난 송씨의 혼백을 모신 본향당이다. 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본향당에서 마을 큰굿을 벌여 문씨 영감과 송씨 부인의 영혼을 불러들여 상봉시킨 후 당신(堂神)으로 모시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해 왔다.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 나와 오솔길로 들어섰다. 농번기여서 그런지 풀을 베지 않아 길에 가득히 솟은 잡초가 발 디딜 곳을 가늠할 수 없게 한다. 그 중에 울타리에서 익어가는 호박만이 한가롭다.
□ 선사마을 표지석 유감
겨우 포장된 어림비로로 나와 어음1리 입구로 접어든다. 공세미의 소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데, 양쪽 길이 갈리는 가운데 떡 하니 ‘선사마을’이란 표석이 버텨 섰다. 얼핏 북방식 고인돌을 연상시키게 만들었는데, 무슨 뜻인가 하여 사방을 둘러봐도 안내문 한 줄 없다. 설촌 400년 된 마을이라면서 ‘선사마을’이라니. 얼핏 빌레못동굴이 떠올랐으나 그곳은 여기서 멀리 떨어진 어음2리 지역이다.
어음2리 477-1번지 일대에서 유물산포지가 확인되었다는데, 그것도 빌레못동굴 가까운 ‘제주 국학원’ 주변 일대다. 거기서 신석기 후기에 해당된 것으로 보이는 조흔문 토기편이 나왔다는 보도를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그로 미루어 어음리 지역은 기원전 2700에서 2000년경에 사람이 살았을 것이라는 추정 기사였다.
□ 공세미와 뒷세미
금성천에 있었다는 공세미의 흔적을 찾아보니, 금성천 냇가에 물허벅을 진 소박한 여인의 석상과 함께 ‘어음1리의 명소 공세미 유래비’란 이름으로 그 내용을 새겼다. 약 400년 전 목자(牧者) 고응삼이 명당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참새 한 쌍이 물에 젖어 나오는 것을 보고 암벽 속에서 공세미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세미는 정자천이 세차게 흐르면서 모습이 사라져 샘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계원동을 돌아 뒷세미에 이르렀는데, 샘을 잘 복원해서 정자까지 세웠다. 계원동은 약 300년 전 고응열(高應悅)이 설촌 했으며, 그의 손자 고백영(高白英)이 후원에서 닭을 길러 하루에 대바구니로 하나씩 계란을 주웠다하여 계원동(鷄園洞, 닭우영동네)이라 헀다는 사연도 새겼다. 취재를 끝내고 나오는 길가에서 ‘동카름못’을 예쁘게 복원하여 맑은 물을 볼 수 있었다.
* 이 기사는 '뉴제주일보'에 연재 중인 필자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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