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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길 이야기

눈 내리는 '사려니 숲길'

by 김창집1 2023. 12. 18.

 

 

20231217일 일요일 눈

 

 

새벽녘에 잠에서 깨니

휴대폰에서는

연신 '제주지방 폭설'을 알리는

안전 안내 문자가 이어진다.

 

오늘은 어느 오름에 가볼까?

 

어제 밤은 모임에서 송년회 행사를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나가기가 심할 정도로 눈보라가 휘날렸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런 날씨에는 

밖으로 나가기가 망서려진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과감히 어둑한 바깥으로 나가

바람 불고 차가운 눈보라 속으로 나간다는 것 자체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용감하게 나가 눈이 펄펄 날리는 숲길에서

하얀 눈을 밟고 걸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집안에서 생각하던 것과는 아주 다른 세상이고

참으로 잘 왔구나하는 생각에

혹, 일 있다고 핑계를 대 놓고선

집안에서 리모컨 갖고 뒹굴고 있을 녀석들이 불쌍해진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서쪽 비자림로 들머리 쪽에 내려

사려니 숲길로 들어서면,

아름다운 숲길이 끝나는 곳,

남조로변 붉은오름 옆 출구까지 딱 10km가 펼쳐진다.

 

들머리에 세워 놓은 도종환 시인의 시

사려니 숲길이 걷는 맛을 더해준다.

 

 

 

 

사려니 숲길 - 도종환

 

 

어제도 사막모래 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 배 열 배나 큰 나무들이

몇 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종처럼 생긴 때죽나무 꽃들이

오 리 십 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쏟아진 빗줄기가 순식간에 천미천 같은 개울을 이루고

우리도 환호작약하며 물줄기를 따라가는 길

나도 그대도 단풍드는 날이 오리라는 걸

받아들이게 하는 가을 서어나무 길

길을 끊어 놓은 폭설이

오늘 하루의 속도를 늦추게 해 준 걸

고맙게 받아들인 삼나무 숲길

문득 짐을 싸서 그곳으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 중산간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종환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하얀 숲길을 걸으며

 

 

오늘은 그렇게 풍성하게 쌓인 눈은 아니지만

충분히 포근하고 걷는데는 푹신거릴 정도다.

 

잡목림 나목 밑에 소복이 솟아오르는 상록수들이 한없이 정겨운데,

때죽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에게 안부도 물어보고

갑자기 나타난 삼나무, 편백나무, 소나무에 눈길을 주며

중간쯤 쉼터에 모여 앉아 막걸리 한 잔 기울이는 것도 낭만이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젖어도 보고

오늘 점심은 어디 가서 어떤 맛있는 걸 먹을까 의논도 하다 보면

어느덧 남조로, 사려니 숲길은 여운을 드리우고 물러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