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꿈치 – 이범철
살짝 너에게 닿는 것뿐인데
온 겨울이 아프다
조금이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숲이 너무 깊다
아픈 너에게 닿는 자리가 숲처럼 어둡다
나무는 서로에게 닿을 때 상처를 낸다
낯선 길에서 자주 눈물을 흘렸던 나와 같다
서로 흔들리지 않았을 때, 나무는 서로를 핥아주다가
연리지가 되는데 너에게 닿았던 팔꿈치는 아픔뿐이다
어디에 심하게 부딪힌 적이 있나요?
일을 무리하게 하신 것 같아요 겨울엔 관절을 조심하셔야 해요
갈대는 가을부터 하늘은 쓸었지만* 겨울 갈대는 높고 가볍고 쓸쓸하다
부딪친다는 것은, 상처 입고 싶은 것이리라
배웅을 마친 마음이 돌아오지 않았던 적이 있나요?
마음을 뜨겁게 쓰지 마세요 상태가 심해질 수 있어요
따뜻한 바람이 멀리서 불어와 앉았다 떠난다
다른 손으로 아픈 곳을 만지고 있는데
팔은 그럴 때마다 어디로 가고, 없다
나의 팔이 갈 수 없는 곳을 무릎은 매일 다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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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의 갈대 “별을/ 쓰느라/ 머리가/ 세었소”에서 인용
♧ 자탄 – 임보
서른셋에 떠난 성인*
천추에 이름이 높고
스물일곱에 옥사한 지사**
청사에 빛나는데
미수의 이 늙은이는
시에 빠져 허덕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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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윤동주
♧ 책벌레와 시인 – 박구미
문예지 겨울호 시 2편 청탁을 받고
한 달째 벌레처럼 오그리고 앉아
쌓아둔 남의 시집만 뒤적이는데
수십 년 전 절판된,
시인의 친필 사인이 적힌 빛바랜 시집에서
벌레 한 마리가 꼬물거리고 나왔다
누구라도 시인이 된다는 계절에도
제대로 된 시 한 편 못 쓰는
명색이 시인이라는 나는 시는 보이지 않고
한평생 시를 먹고 자랐을 저 생이 마냥 부러워
한참 넋을 놓고 있는데
시 속을 나온 저 시인 같은
아직 시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벌레 같은
♧ 티끌 – 위인환
작다고 깔보지 말라
바위도 깨뜨릴 수 있다
약할 땐 바람을 타지만
눈에 들어오면 해일이 인다
못이 되기도 하고
태산이 되기도 한다
불나방 같은 내가
불을 찾아 서성거릴 때
어머니는 그랬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난기류에 휩쓸려
가슴에 못으로 박혀도
아프다
내색하지 않았다.
♧ 달은 왜 물고기의 눈이 되었을까 – 김미외
구름은 떼 지어 흐르다 보름달 앞에 머물렀을 뿐인데
눈을 가진 물고기가 되었다
밤의 고요를 깨우고 싶어 움찔대던 속마음 들킨 것처럼
잠 언저리 돌던 눈이
환한 빛에 껌뻑거리며 뒤척인다
텀벙 갯내음 한 조각 튕김을 내줄 것 같은
별들의 뒷모습에 출렁이고 싶다고 느꼈던 순간
절벽 아래로 뚝 떨어지고 마는 빗방울의 슬픔이 생각나서
하늘은 구름에게 눈을 주었을까
바다에 풀어놓은 푸른 중얼거림 건져
다시 오지 않을 어제와 내일의 새벽노을에 철썩여 보라고
시야를 밝힌 것일까
말랑하고 푸근한 파도가 수런거리고
둥실둥실 물고기 지느러미가 출렁인다
밤길이 환하다
*월간 『우리詩』 12월호(통권 제426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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