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원 그날 – 강덕환
조, 조름에서
미, 밀지 맙서게
지, 지둘라부난
오, 오몽을 못허쿠다
푸, 푸더지쿠다
동, 동겼닥
놔, 놨닥
흐, 흥글쳐부난
가, 가점직허우다
아, 아가기여!
가, 가사쿠다
…, ……
♧ 늘 두려운 것이다 – 강봉수
오늘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삼십년을 함께 살았는데
설레던 맘도 예전 같지 않고
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던 날들이
희미하다
오늘도 그 사람 만날 수 있을까
도시엔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데
모두가 얼굴이 없다
손에 쥔 세상만 쳐다보는 사람들
밥상 앞에 앉은 아들도
얼굴이 없다
오늘도 무사할 수 있을까
달리는 자동차와
날마다 땅에 넘치고 바다를 메우는 쓰레기산
보이지 않게 허공을 떠도는 불순의 공기
오늘 무사할 수 있을까
늘 두려운 것이다
♧ 물웅덩이 - 고영숙
읽어 내리지 못한 손금이 고요한데 어느 방향에 얼굴을 묻고 있는지
백년을 아가미 흔적을 쫓던 달그림자가 깨지고
더운 피가 흐르는 양수(羊水)가 흔들리고 열 손가락이 허공으로 차오른다
팔딱거리는 붉은 비늘을 긁으면 갓 핀 피 한 방울이 물결을 일으키고
젖몸살로 불어나는 물살, 멈칫거리다 채 마르지 않은 붉은 탯줄이 건너간다
물살은 흐르라고 강을 만들었지만
익녀(溺女)*야, 그릇 아래는 절벽이란다
웅크린 채 온힘을 다해 열 달 살얼음판을 건너왔지만 홀로 던져진 몸뚱어리
물살에 발목이 잡힌 채, 낙인처럼 달빛에 찍힌 채
놓친 숨이 애끓어서 말라가는 빈 손톱
물 안에서 태어나고, 물 밖에서 태어나지 못한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물속에 뛰어들어 수장된 만월(彎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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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녀(溺女): 중국에서 딸을 낳으면 그릇에 익사(溺死)시키던 관습.
♧ 산사람들 - 김경훈
-2023 한라산 아미봉 4․3해원상생굿에 부쳐
배곯아 죽는 사람 없는
낫 놓고 기역 자 모르는 사람 없는
바람 막을 집 한 채 안 가진 자 없는
외래 모리배 없는
검은머리 외국놈 없는
그런 순수 절정의
그런 평등한 인민의 나라를 위해
그런 해방 통일의
그런 자주의 탐라를 지키기 위해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으면서도
혁명을 움켜쥔 사람들
좌절과 체념을 딛고 오직 분노로
숯불처럼 투쟁의 불씨를 일군 사람들
의롭게 싸우다 의롭게 죽어간 사람들
역사에도 지워지고 그 흔적만
한라산에 남아 있는 사람들
산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두 번 죽어간 사람들
우리가 애써 다시 이름을 불러야 할
다시 돌아올 사람들
산사람들
한라산의 의인들
통일 조국의 위대한 유공자들
♧ 노로오름에서 – 김규중
눈길을 걷는 거는
먼저 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보여서다
눈길을 잊지 않은 거는
내 발자국 모양을 자세히 볼 수 있어서다
눈길을 다시 가고 싶은 거는
오래된 발자국은 눈보라에 감추고
새 발자국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작가회의 간 『제주작가』 2023년 겨울호(통권 제83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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