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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9)

by 김창집1 2023. 12. 27.

 

 

어떤 처방

 

 

맞벌이 20년 만에 집을 산 정희 언니

산에서 냇가에서 꽃도 돌도 들였는데

마당엔 객식구들만 와글와글 피어나

 

언제부터 동티났나, 까닭 없이 아파 와

큰 병원도 가보고 푸닥거리도 해봤지만

그 병엔 백약이 무효

하늘만 바라봤다지

 

하루는 어느 보살 처방전을 따라서

꽃과 나무 돌덩이마저 제자리에 갖다놓자

그것 참, 거짓말처럼

싹 나은 정희 언니

 

 

 

 

아크릴사 수세미

 

 

간혹, 실 한 올이 구원일 때가 있다

광대가 외줄 타듯 아슬아슬 세상 안쪽

그 실낱 붙들어 안고,

외줄 타는 생이 있다

 

사람을 믿었다는 게 죄라면 죄인데

누가 보증 섰나, 가을 하늘 노을빛

고향 땅 언덕길 몰래

밟고 오는 추석 달

 

몇 년 만에 돌아온 고모의 하얀 손길

슬그머니 건네는 손뜨개 털수세미

그 한 올, 한 올 아니라면

저 달 어찌 재웠을까

 

 

 

 

ᄎᆞ마가라 ᄎᆞ마도가라

 

 

풍경을 찍었는데 사람이 돌아본다

마흔 즈음 헤어지면 사랑이 다시 올까

달빛이 산책하는 저녁

돌싱들이 모였다

 

세상을 얕봤던 걸까, 두 아이의 엄마는

몇 번째 발목 잡힌 문장으로 울고 있다

아이가 하나였으면

하나만 있었으면

 

아무리 돌려 말해도 용납이 안 되는 행간

ᄎᆞ마가라 ᄎᆞ마도 가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들썩이는 어깨

손을 가만 얹는다

 

 

---

* 상상을 뛰어넘는 일을 했거나, 크게 놀랄 만한 일이나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을 때, 못마땅하게 여겨 내는 소리. 제주어.

 

 

 

 

간지 뜯긴 자화상

 

 

태풍이 들이닥쳐도 축제는 열리리라

파도소리 다 퍼주는 금능바다 돌그물

그 안에 걸려든 것이

어디 물고기뿐일까

 

빠져나가려 점점 더 발버둥치는 문장

시인들의 시판에 꼽사리 끼지 못한 시집

간지가 뜯겨진 채로 축제판에 널려 있다

 

누구나 아무거나 공짜로 가져가라니

오래 가자는 고백 그대에게 닿기 전에

아닌 척, 나를 숨기는

슬픈 너를 고른다

 

 

 

 

 

 

서귀포 칠십리공원 밤새 누가 다녀가네

 

봄까치꽃 괴불주머니 그리고 뚜껑별꽃

 

도대체 무단투기를 누가 눈감은 걸까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시인동네 시인선 215,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