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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완)

by 김창집1 2024. 1. 15.

 

 

하가리 연화지

 

 

이따금 샛바람이 수양버들 건드린다

뭣도 모른 어린 봄, 마을을 흔들어대도

연못은 꽃 한 송이 없는 고요만을 키운다

 

그 고요 먹고 자란 우렁우렁 소문들

연이 없는 못물에 구름처럼 몰려와

둥실 뜬 문장부호들 필사라도 하는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맹꽁이 울음 그친 날은

인기척도 뜸해지고 당신이 잊힐까 봐

봄밤은 울어야겠네 나라도 울어야겠네

 

 

 

 

몌별

 

 

주석을 달아봐도 이해할 수 없다더니

 

어느 날엔 설득에 설득을 하는 당신

 

하루는 잊고 산다고

 

또 하루는 그립다고

 

 

 

 

가을의 서사

 

 

다른 일은 젬병이어도 호박 농사 잘한다고

호박 농사만큼은 아버지께 부탁했다

이유는 다들 모른다

아버지만 알 뿐이다

 

손수레로 한가득 가을을 싣고 오다

하나 둘 나누다 보면 몇 덩이만 덩그러니

 

가을은 그렇게 왔다

정물화 한 점으로

 

 

 

 

적산 온도

 

 

산불이 나야 씨를 퍼뜨리는 로지폴소나무나

칠백 년 진흙 아래서도 고운 아라홍련이나

삼만 년 얼음을 견딘

심장빛 꽃이거나

 

차곡차곡 저금한 그 온도에 이르러야

한꺼번에 꽃이 핀다, 수굿이 네가 온다

이 봄이 그렇게 와서

너처럼 가려 한다

 

 

 

 

고삐

 

 

세상에 함부로 놓아선 안 되는 게 있다

아버지는 그것을 가족에 대한 예의라셨다

서늘한 고삐의 행간

일기장에 고여 있다

 

말이 보는 세상이 네가 보는 세상이다

너무 꽉 잡지도 말고 느슨하게도 말고

언제든 잡아챌 수 있게

손안에 쥐고 있어라

 

사람이 만만해 뵈면 제 등에 태우지 않는다

몇 걸음 걷다가 내동댕이치더라도

고삐는 절대 놓지 마라

방향타가 될 터이니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시인동네 시인선 215,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