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가리 연화지
이따금 샛바람이 수양버들 건드린다
뭣도 모른 어린 봄, 마을을 흔들어대도
연못은 꽃 한 송이 없는 고요만을 키운다
그 고요 먹고 자란 우렁우렁 소문들
연이 없는 못물에 구름처럼 몰려와
둥실 뜬 문장부호들 필사라도 하는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맹꽁이 울음 그친 날은
인기척도 뜸해지고 당신이 잊힐까 봐
봄밤은 울어야겠네 나라도 울어야겠네
♧ 몌별
주석을 달아봐도 이해할 수 없다더니
어느 날엔 설득에 설득을 하는 당신
하루는 잊고 산다고
또 하루는 그립다고
♧ 가을의 서사
다른 일은 젬병이어도 호박 농사 잘한다고
호박 농사만큼은 아버지께 부탁했다
이유는 다들 모른다
아버지만 알 뿐이다
손수레로 한가득 가을을 싣고 오다
하나 둘 나누다 보면 몇 덩이만 덩그러니
가을은 그렇게 왔다
정물화 한 점으로
♧ 적산 온도
산불이 나야 씨를 퍼뜨리는 로지폴소나무나
칠백 년 진흙 아래서도 고운 아라홍련이나
삼만 년 얼음을 견딘
심장빛 꽃이거나
차곡차곡 저금한 그 온도에 이르러야
한꺼번에 꽃이 핀다, 수굿이 네가 온다
이 봄이 그렇게 와서
너처럼 가려 한다
♧ 고삐
세상에 함부로 놓아선 안 되는 게 있다
아버지는 그것을 가족에 대한 예의라셨다
서늘한 고삐의 행간
일기장에 고여 있다
말이 보는 세상이 네가 보는 세상이다
너무 꽉 잡지도 말고 느슨하게도 말고
언제든 잡아챌 수 있게
손안에 쥐고 있어라
사람이 만만해 뵈면 제 등에 태우지 않는다
몇 걸음 걷다가 내동댕이치더라도
고삐는 절대 놓지 마라
방향타가 될 터이니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 (시인동네 시인선 215,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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