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찬비가 온다
너에게 보낸 편지가 다 젖을까
온종일 그 생각만 하다가 문득
밤의 깊은 곳에서 내가 걱정한 것은 그게 아니고
네가 울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그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이것으로 내 마음의 여섯 번째 무늬를 삼는다
편지가 온다 겨울 냄새 묻어온다
22023년 겨울
장이지
♧ 먼 곳
당신에게 엽서를 띄우기 위해 나는 멀리 떠나네 여행지에서 우리는 아름답고 기묘한 엽서를 사 오곤 했는데 돌이켜 보니 서로에게 엽서를 쓴 적은 없었네 엽서에 나는 뒤늦은 사랑을 쓰면서 동시에 엽서에 대해 쓰네 오, 정말, 엽서에 상처를 내는 펜촉, 상처를 내지 않고는 이 엽서를 다시 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아네 우리 안의 어딘가가 이미 죽어 있었다면 우리는 더 적절히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서로에게 덜 기대하고 서로를 덜 파괴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상처를 내지 않고는 사랑을 쓸 수 없네 부서져 새로 태어나지 않고는 말이야 슬프지 않은 엽서를 찾아 나는 멀리 떠나네 이 세상에 없는 엽서를 찾아서 떠나네 다시 사랑의 취기가, 도취의 파도가 소인으로 찍히는 것을 상상하면서
♧ 해안선
밀려왔다 밀려가면서 내게로 접혔다 펴지기를 거듭하는 편지, 여기에 나는 발을 담그면서 나의 모래투성이 발을 보면서 내가 나임을 점점 알 수 없게 된다 눈물에 깎여가는 낯선 자리에서 나는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밀려오는 파도는 그 시선을 자꾸 내 안으로 접는다 한 마리 작은 새가 구름 속을 날아 어디론가 사라진다 자몽 및 금박을 입힌 구름이 저기 있다 내 안에 있는가 저녁이 마스카라처럼 번진다 손톱이 떠밀려온다 모래투성이 귀가, 눈썹이 떠밀려온다 꿈의 꿰맨 자리를 물거품으로 지운다 운다
♧ 라플란드
조카가 시에는 무엇을 담느냐고 묻기에 편지에는 내장을 담지, 하고 가르쳐준다 라플란드 할머니가 핀란드 할머니에게 편지를 보낼 때 생선의 내장을 긁어내고 그 죽음에 편지를 쌌듯이, 만지면 아픈 시를 쓸어안는다 무슨 말이든 잘 믿는 조카가 시에는 무엇을 담느냐고 묻기에 편지에는 꿈틀대는 내장을 담는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보다도 하얗게 하얗게 쓸어안는 게 중요하다고 눈 오는 밤의 봉인이 중요하다고 속여본다 속아주려느냐 조카야, 이것은 너만 속이려는 게 아니란다
♧ 외워버린 편지
편지를 태우기 전 거듭 읽는다 당신이 부탁한 대로 거듭 읽어 외운다 편지는 불타고 재와 연기가 난무한다 매캐한 위치에서 홀로 나는 당신을 이해해보려 하지만 당신은 내 곁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오 나의 당신, 귀 안에 느껴지는 당신의 필압筆壓 나는 당신의 편지를 거의 외우다시피 한다 타버린 편지는 난분분히 어두운 목소리 되어 창백한 해를 살라 먹는다 이 어두워가는 세계로 당신은 삼켜진다 귀안으로 흘러드는 잉크, 귀 안의 독, 귀 안의 잇자국, 나는 당신 목소리만큼 무거운 당신의 필압을 느낀다 곁이 아니라 당신은 내 안에 있다 신장을 누르는 보라색 필기체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창비시선 495,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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