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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의 시(1)

by 김창집1 2024. 1. 17.

 

 

시인의 말

 

 

찬비가 온다

너에게 보낸 편지가 다 젖을까

온종일 그 생각만 하다가 문득

밤의 깊은 곳에서 내가 걱정한 것은 그게 아니고

네가 울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그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이것으로 내 마음의 여섯 번째 무늬를 삼는다

편지가 온다 겨울 냄새 묻어온다

 

                                22023년 겨울

                                           장이지

 

 

 

 

먼 곳

 

 

   당신에게 엽서를 띄우기 위해 나는 멀리 떠나네 여행지에서 우리는 아름답고 기묘한 엽서를 사 오곤 했는데 돌이켜 보니 서로에게 엽서를 쓴 적은 없었네 엽서에 나는 뒤늦은 사랑을 쓰면서 동시에 엽서에 대해 쓰네 오, 정말, 엽서에 상처를 내는 펜촉, 상처를 내지 않고는 이 엽서를 다시 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아네 우리 안의 어딘가가 이미 죽어 있었다면 우리는 더 적절히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서로에게 덜 기대하고 서로를 덜 파괴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상처를 내지 않고는 사랑을 쓸 수 없네 부서져 새로 태어나지 않고는 말이야 슬프지 않은 엽서를 찾아 나는 멀리 떠나네 이 세상에 없는 엽서를 찾아서 떠나네 다시 사랑의 취기가, 도취의 파도가 소인으로 찍히는 것을 상상하면서

 

 

 

 

해안선

 

 

   밀려왔다 밀려가면서 내게로 접혔다 펴지기를 거듭하는 편지, 여기에 나는 발을 담그면서 나의 모래투성이 발을 보면서 내가 나임을 점점 알 수 없게 된다 눈물에 깎여가는 낯선 자리에서 나는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밀려오는 파도는 그 시선을 자꾸 내 안으로 접는다 한 마리 작은 새가 구름 속을 날아 어디론가 사라진다 자몽 및 금박을 입힌 구름이 저기 있다 내 안에 있는가 저녁이 마스카라처럼 번진다 손톱이 떠밀려온다 모래투성이 귀가, 눈썹이 떠밀려온다 꿈의 꿰맨 자리를 물거품으로 지운다 운다

 

 

 

 

라플란드

 

 

   조카가 시에는 무엇을 담느냐고 묻기에 편지에는 내장을 담지, 하고 가르쳐준다 라플란드 할머니가 핀란드 할머니에게 편지를 보낼 때 생선의 내장을 긁어내고 그 죽음에 편지를 쌌듯이, 만지면 아픈 시를 쓸어안는다 무슨 말이든 잘 믿는 조카가 시에는 무엇을 담느냐고 묻기에 편지에는 꿈틀대는 내장을 담는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보다도 하얗게 하얗게 쓸어안는 게 중요하다고 눈 오는 밤의 봉인이 중요하다고 속여본다 속아주려느냐 조카야, 이것은 너만 속이려는 게 아니란다

 

 

 

 

외워버린 편지

 

 

   편지를 태우기 전 거듭 읽는다 당신이 부탁한 대로 거듭 읽어 외운다 편지는 불타고 재와 연기가 난무한다 매캐한 위치에서 홀로 나는 당신을 이해해보려 하지만 당신은 내 곁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오 나의 당신, 귀 안에 느껴지는 당신의 필압筆壓 나는 당신의 편지를 거의 외우다시피 한다 타버린 편지는 난분분히 어두운 목소리 되어 창백한 해를 살라 먹는다 이 어두워가는 세계로 당신은 삼켜진다 귀안으로 흘러드는 잉크, 귀 안의 독, 귀 안의 잇자국, 나는 당신 목소리만큼 무거운 당신의 필압을 느낀다 곁이 아니라 당신은 내 안에 있다 신장을 누르는 보라색 필기체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창비시선 495,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