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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서안나 시집 '애월'의 시(4)

by 김창집1 2024. 3. 2.

 

 

어류 화석 무늬

 

 

밤을 오래 읽었다

 

애월(涯月)을 풀어쓰면

열다섯 획이 비스킷처럼 부서진다

 

밤은 오타로 가득하고

레이스 커튼을 걷으면

속병 든 사람 하나

어류 화석 무늬처럼 앉아 있다

 

풀어 놓는다

꽃과 바람과 당나귀를

속병 든 당신에게

 

나는 나를 어떻게 지우나

나는 현무암처럼 검어진다

 

사내의 뒷모습이 물고기를 닮았다

밤이 연속된다

 

 

* 순암 선생 영정

 

 

애월, 순암* 서간(順菴 書簡) 1

 

 

  나는 광주 안씨 가문의 후손으로 화려한 관직에도 오르지 못한 미욱한 필부이니라

  관직에 오르려 정성을 다하면 말단 한직으로 나아갈 수도 있으련만

  나는 홀로 산과 강물과 바다와 우주와 마주 앉아

  세속에서 먼지를 묻히며 애민(愛民)의 학문에 정진하노라

 

  젊은 날 내 아비가 전답을 모두 팔아 빈궁한 탓에

  노비와 함께 숯을 굽고 팔아 배고픔을 면했다네

  허나 인간이 곡식으로 배고픔을 떨친다고 영혼까지 환해질 수 있다더냐

  나는 궁핍하고 핍진하나 나를 열고 세상을 향해

  나의 학문을 밀고 나갈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오

  태평성대 시절이라 하나 인간이 생로병사의 연옥에 갇혀 있고

  비리를 일삼는 위정자들의 세 치 혀에 놀아나는 이 시절

  우리는 얼마나 더 나답게 살 수 있는가

  이를 고민하는 것이 강학이지 않은가

 

  내 나이 삼십 오세에 나는 학문과 삶의 경계를 지웠다네

  가뭄처럼 갈라진 내 영혼에 커다란 실사구시의

  학문의 물길을 들이고자 하였네

  더 크고 먼눈으로 식견을 깨우치려 큰 스승 성호 이익을 만나러

  안산 성촌(聖村)에 가 제자로서 배알 하였네

  국학으로 스승과 함께 중국의 속국이 아닌 대조선의 기상과 길을 찾는

  역사책을 저술하는 커다란 대업을 꿈꾸었지

 

  나는 스승 성호 이익과 일생 네 번을 만났으나

  마음과 서간(書簡)으로 그이와 평생을 만났노라

  이십 년 동안 스무 권 이십 책을 엮었다

 

  나는 스승 성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필담으로 세상을 일으키고 부수기를 수천수만 번

  꿈에서도 검은 붓을 놓지 못하였다네

  나의 식견이 모자라 스승과 논쟁하고 토론하고 부딪침도 있었으나

  스승의 경세치용학은 만물의 근본이며 근기 실학의 뼈대이니

  나는 눈이 아닌 손과 발과 심장으로 서책을 다 읽었노라

 

  스승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이르기를

  ‘지극히 천한 퇴비와 지푸라기라도 밭에서 곡식을 기르고 부엌에서 반찬을 만드는 데 쓰인다. 이 글을 잘 보면 어찌 백에 하나라도 쓸 만한 것이 없겠는가?’ 하였네

  글을 읽고 쓰는 강학은 공자가 이르기를 삼불후(三不朽) 중의 하나라 하지 않았는가

 

  학문을 한다는 것은 곧 자신 안의 연못을 고요하게 바라보는 일이 아니겠나

  가옥의 택호를 이택재라 부른 뜻도

  학문이란 서로 높고 낮음이 없으니 두 개의 연못을 오가는 문장의 힘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평등하게 밝히라 하는 뜻이네

  필시 학문에는 인간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이 있어야 함이네

  나는 아침마다 흙 마당을 정갈하게 비로 쓸고 키 작은 화초들을 정성스레 가꾸었네

  대청 아래 작은 나무 한 그루 심었으니 후학들이여

  삶이 곤궁하고 마음 빈한할 때 이 나무 울울창창해지면

  무량한 그늘 한 채씩 가슴에 섬으로 띄우시게나

 

 

*사당 이택재의 충숙당

 

 

  이택재에서 어둠에 마른 붓 적셔

  곧고 정한 글로 아침을 부르면

  나이 든 아들의 뒷모습을 흐린 눈과 젖은 손으로

  정한수 떠 놓은 노모의 그 애틋한 눈빛이

  등 뒤에 서늘한 바람으로 와 닿는다네

  노모의 기도가 녹아든 새벽의 정한수를 해맑은 복숭아 연적에 담아

  역사라는 커다란 바위를 그려 옮기고 나누고

  그 바위에 깃든 잔 실금까지 소상히 정리하여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노라

  거친 문장과 연문(衍文)**으로 미욱한 문장이 많으나

  그 이름을 동사강목(東史綱目)이라 칭하겠네

 

  동사강목은 곧 역사의 근간이 백성임을 군주가 깨닫는 것이네

  어리숙하고 미욱한 아픈 속내를

  백성들의 발아래 고개 숙이고 굽힌 허리로 읽는 군주의 경배법이오

 

  어리고 유약한 것을 가여이 여기고

  강한 자에게 자신의 복중 의지를 발설하는 이가

  곧 역사의 주인임을 이르는 것이니

 

  이택재에서 글을 쓰고 사료를 읽다 보면

  문득 우주가 작은 글자 하나에

  앞마당의 미물 하나에 당도해 있음을 알게 되나니

 

  스승은 서간으로 내게 이런 말씀을 전하셨네

  “성인(聖人)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향원(鄕愿)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옳은 듯하지만 옳지 않으며 그 의견 또한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공자도 향원이라 불리는 무리를 덕의 도적이라 하여 자신에게서 멀리 두셨다

  교언영색하고 겉만 번듯한 자들이 거짓 학문을 진실이라 강조하니

  나는 평생 사학에 몸을 담아 덕의 도적이 되지 않기를

  컴컴한 이택재의 마당에서 빛나는 달과 별을 보며

  내 조상과 모친과 아이들에게 마음으로 엎드려 사뢰었네

 

  잘 덖은 차를 마시면 새벽 내 글씨에도 차향이 어리듯

  이택재에서 도반들과 학문의 즐거움을 알고

  학문으로 세상을 밝히는 실사구시의 정신을 함께 이루기에 힘썼네

 

  역사란 무엇이던가,

  동사강목을 쓰면서 놓을 수 없는 질문이었네

  그 거대한 괴물 같은 역사란 것이

  사람을 삼키기도 하고 불을 토하기도 하고

  한나라를 불구덩이에 휩싸이게 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왕이 왕을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피 묻고 피를 묻히는 살생부가 아니었던가

  역사는 곧 올곧은 사람을 탄생시키는 것이니

  의를 너무 강하게 내세우지도 말 것이며

  감성을 너무 가까이 두지도 말 것이다

 

  역사를 알아야 주인이 되니

  내 이런 연유로 마늘 냄새나는 곰과 호랑이와

  단군과 환웅의 발자취부터

  고려 말까지의 통사를 소상하게 적으니

  역사는 곧 백성이 주인이라

  내가 주인이고 당신이 주인이다

  흙 묻은 그 서툰 발로 지도를 만들고

  필부의 기상과 농부와 아낙과

  팔순 노인네와 어진 아이들의 함성이

  곧 지도를 만들고 세상을 밀고 나갈 것이니

 

  모든 별과 산맥들과 강물과 바람과

  나무와 화초와 발 달려 땅을 기어가고

  물에서 지느러미를 흔드는 것들은 들으라

  사람을 아끼는 순연함이 곧 그 중심에 있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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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은 동사강목을 저술한 안정복 선생의 호.

**연문(衍文) : 잘못하여 글에 들어간 쓸데없는 글귀.

 

 

                           *서안나 시집 애월(여우난골, 2023)에서

 

 

*순암 선생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