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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의 시(3)

by 김창집1 2024. 3. 3.

 

 

남문사거리

 

 

불빛을 껌뻑이는 충혈된 도로는

어느 도시의 슬픈 눈인가

 

긴긴 행렬의 선두에서 둔덕을 톺는 할머니

수레 뒤로 쏟아지는 책

아니, 가만 보면 죽어가는 새

 

꺼져가는 불빛을 되살려 보려고 홰를 치는구나

 

글로 밥 벌어먹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꿔 본 적이 없는데

 

제 몸뚱이를 앞세워

한때 누군가의 열정을 부추겼던

이젠 아무도 안 익는 책, 철 지난 잡지 따위를

싣고서라도 나아갈 이유가 있는 세상인지

따져 본 사람은 되레

느리게, 느리게

요람 속에 잠든 이의 밥걱정을 달래고

 

, 이 답답아, 가린다고 가려지나 그게

 

엊저녁엔 품에 죽어 가는 새를 안고

함께 호흡을 맞추며 잰걸음 했었지

 

살릴 수 있어. 살 수 있어. 살 거야.

 

그렇다면 나는 괜찮은 사람인가

나 정도면

나 정도 쓰면

이 도시의 잉걸불을 아름다운 점묘화라 말할 수 있나

 

그런 말을 가슴에 품는다고 다 시인인가

 

, 오늘도 기어코 새는 죽지를 않는구나

 

 

 

 

모라토리엄

 

 

자기야 나 있지,

언젠가 아름다운 새가 될 거야

당신 귀에 속삭였어요

 

날개짓을 하다 보면 어느새 행려병자의 잇새에 낀

아픔을 쪼아 먹는 악어새가 된다는 계획,

 

그런 다짐,

하는 순간부터 뭐든 가능성은

생기는 거니까요

 

가슴과 맞닿은 방바닥의 떨림을

아득한 꿈의 여닫이문에 두드리는

노크라 여기며

새의 날갯짓을 흉내 냅니다

 

가능성이라는 마약을 뒷거래하는 밀실에서

작은 일교차에도 흔들리는

부패해 버리는 여리고

어린 우리

 

서로의 팔뚝에 만년필촉을 꽂아 주었어요

바늘 자국을 문지르며

침을 흘리며 비틀거리며 어지럽다고

 

내일부터

정말 내일부터 하자고

 

얼빠진 얼굴로 웃으면

눈 밑에 내려앉는 인기척 없는

밤하늘이 번져 와요

 

 

 

 

울면서 달리기

 

 

네 맞은편

커피 잔에 들러붙은 방울방울은

한 방울이 돼

건물 외벽을 타고 외진 길 뒤로

얼른 도망쳐 버리고

 

언제나 넌 그런 식이었어

 

울컥하며 들썩이는 게 꼭

양은 냄비 뚜껑인 줄 알고 들었다 놓쳤을 뿐

 

그것이 누군가 당겨 둔 활시위라는 걸

늦장마가 오고 나서 알아차렸지만

 

사방으로 튀는 슬픔이

밤새 배를 까뒤집고 생떼 쓰던 아이가

더러운 흙바닥에 그려 놓은 동그라미에

알알이 박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네게 설움도 무엇도 되어서는 안 되니까

 

설령 슬픔의 과녁에 적중한다 한들

정중앙에 달린 밤의 젖꼭지를 비틀면

 

방패 모양으로 웅크리던 나는

정신이 바짝 들어서

이른 새벽 골목으로 빠져나갔다

탈진한 몸을 끌고서라도

 

나는 네게

한 방울도 흘리지 않거나

다 울어버린 뒤거나

그런 식이어야만 하니까

 

물을 반쯤 채운 물탱크차가

낮은 과속 방지턱만 넘어도

물이 앞으로 출렁이며

수 톤의 차를 넘어뜨리는 것처럼

 

이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다

달려서 네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걷는 사람,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