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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의 시(4)

by 김창집1 2024. 3. 5.

 

 

통화(通貨)

 

 

   지하 일층 아래 이층 아래 삼층이 있어서 저는 그것을 편지에 적어 당신에게 주려합니다만 아무래도 저는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어서 우물 아래 닫힌 눈으로 내려가 슬픈 거울을 짭니다 몇 해인가 제가 쓰다만 편지는 통화(通貨)가 되어 원더랜드의 대기권을 수놓았지만 통용된다는 것은 언제나 몇 발자국 비켜서거나 물러서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쌓여만 가는 편지 더미에 마음을 가져다 대보는 키 재기를 수없이 하다가 턱 밑에 흰 수염 몇 가닥 돋은 줄도 모르는 어둑사리가 됩니다…… 오늘도 깊이 없는 이 얄팍한 거리를 슬픈 거울 등에 지고 터벅터벅

 

 

 

 

기대

 

 

  당신의 편지가 오네 오고 있네 내가 그것을 소리 내어 읽으면 당신의 혀가 내 귓불에 닿고 당신의 부드러운 혀가 내 귀 안에 이미 있네 당신의 편지는 오고 있네 오네 동구 밖까지 왔을까 잡화점 앞을 무사히 지났을까 라플란드의 집배원이 커다란 가방에서 당신 편지를 찾아 초록색 지붕의 집 귀에 넣어둘 것이네 오, 나는 그것을 소리 내어 읽어야지 소리 높여 읽어야지 그러면 이미, 내 귀 안에 있는 당신의 혀, 당신 혀의 무수한 미뢰들, 하나하나 벙그는 말의 꽃봉오리들

 

 

 

 

러시아 인형

 

 

  러시아 인형처럼 어머니를 열어보면 내가 있다 아버지를 열어보면 내가 있다 그분들은 거인이다 나는 아주 작다 나는 열어볼 수 없는 맨 마지막 인형이다 아주 작은 인형이다

 

  지방의 한 화학 공장, 유해 물질을 노()로 젓는 거인이 있다 나는 대학으로 멀리, 멀리 도망친다 아직이다 우리 사이에 시베리아가 있어도 아직 보인다 죽음의 스프를 젓는 거인이 보인다 나는 우아하게 시를 짓고 서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투명한 계단을 오른다

  아버지는 내 시를 궁금해하신다 어머니는 내 시를 궁금해 하신다 그러나 너무 잘 보여서 그분들은 거인이다나는 그분들에게 편지를 쓰지 못한다 우리 사이에 편지는 없다 아버지는 텔레파시를 믿고 어머니는 자주 꽃 사진을 내게 보낸다 나는 모국어를 잊어가는 작은 인형이다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창비시선 495,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