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는 분노로 오시라 2 - 김경훈
-故 양용찬 열사 32주기에 부쳐
불로 가신 그대여
다시 오실 때에는
행여 눈물로는 오지 마시라
한숨으로도 오지 마시라
절망으로 가신 그대여
다시 오실 때에는
행여 실망하여 오지 마시라
비탄으로도 오지 마시라
불의에 맞서 가신 그대여
이제 시퍼런 의로움으로 다시 오시라
이 기만적인 반역과 퇴행의 시대에
들끓은 마음들 일으킬 창의(倡義)의 깃발로 오시라
미군기지 제2공항 국토를 도륙하는 자들
개발의 환상에 눈 뒤집혀 법조차 뭉개는 자들
이 천박한 오만과 저열한 독선을 날려버릴
심열로 들끓는 억센 돌개바람으로 오시라
분노가 모여 응집된 정의가 되게
그대는 맞불의 연대로 어깨 걸고 오시라
저당 잡힌 고운 생명들 다시 지킬
그대는 활화산같이 거대한 분노의 해일로 오시라
♧ 기억의 탈출과 계속 – 김규중
김동일 할머니 뜨게 유품 전시회,
가까이 다가가 만져본다
보드랍고 따뜻한
빨간 파란 하얀 노란
할머니 손끝에서 털실이
수백 점이 뜨개 작품이 되었다
영원히
망각하고 싶었으리
소녀 연락병으로 동굴에서
토벌대에게 잡혀서
동지가 총살되고 머리는 잘려
구경거리로 동네를 배회하는
악몽이 스멀스멀 가슴을 휘감는 시간
바늘의 은밀한 움직임에
털실의 다양한 모양에
온 정신을 집중하며 악몽에서 벗어났으리
끝내는
기억하고 싶었으리
재수가 좋아 살아남은 자,
죽은 자에게 서러워하지 말라고
큰일을 했다는 말을
내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도시락 가게 할머니지만
연락을 담당했던 소녀병이지만
자신을 다이아몬드로 여겨
털실이 사각형에서
육각형으로 연결되며 가 닿은 것은
해바라기 모양이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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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일 할머니 뜨게 유품 132점이 임흥순 개인전 ‘기억 샤워 바다’(2023.9.16.-11.12, 제주 4․3평화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소개됨.
**‘재수가 좋아 살아남은 자, 죽은 자에게 서러워하지 말라고 큰일을 했다는 말을’, ‘자신을 다이아몬드로 여겨’는 구술자료 『자유를 찾아서-김동일의 억새와 해바라기의 세월』(김창후, 선인, 2008)에서 취함.
♧ 달의 원근 – 김병택
달의 한쪽을 차지한 뜰에는
바닷가 초가집 빈 마당과,
큰 소쿠리 하나씩 옆에 끼고
종종걸음으로 가는 아낙네들의
아득한 곡선으로 어른거렸다
아무리 눈여겨보아도
아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서쪽으로 이동하면
달에 쌓여 있던 노란 빛들이
여기저기에 마구 부딪힌 뒤
둥근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끼 자란 마음속의 달은
자주 감정의 물결에 휩쓸렸다
기쁠 때는 크게 확대되었고
슬플 때는 예상외로 축소되었다
혼자 길을 걸으며 바라본 달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듯
가까운 곳에 떠 있었지만
길고 긴 불면의 밤을 보내며
뒤뜰에서 바라본 달은
온화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 계간 『제주작가』 2023년 겨울호(통권 83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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