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소시집 – 장문석 편]
♧ 동짓달 초닷새
강물은 옆구리의 군살을 마저 빼기 시작했다 바람의 결을 살피던 갈대도 서둘러 외투의 깃을 여몄다 찌르르 찟찟 붉은머리오목눈이가 그 안에 깃들었다
청홍의 혼인색 번쩍이며 여울목 넘나들던 불거지도 마침내 제 짝을 찾은 듯, 아니, 더불어 지느러미 겯고 수초침대에 든 지 오래인 듯, 파르르 물무늬 번진다 머잖아 포근한 살얼음이 깔릴 것이다
등성이 넘나들며 비바람 뿌리던 민머리 구름이 회색 털모자를 찾아 썼다 바야흐로 빙설 가공 공장을 가동했다는 신호, 돌이켜보면 초벌구이 진눈깨비가 몇 번인가 창문을 두드렸다
비로소 톱밥 난로에 불을 지핀다 사내는 구절초 달인 물을 마시며 지난 생의 아홉 마디를 음미 중이다 둥지의 어둠이 멀지 않았음이다
♧ 12월
또 한 겹 나이테를 돌아
종착지가 지척이다
실핏줄 끝끝마다 연초록 새순을 틔우던
연모의 날들이 있었다
짧았지만 꽃향 분분한 곡선주로였다
폭풍우에 천둥 박차를 가하던
질풍노도도 있었다 수시로
물관은 찢어졌고, 그 틈새로
생명의 외경이 번쩍였다
그때의 나는 외롭고 높고 뜨거워서
살아있음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열매의 제단에 술잔을 올릴 때는
하염없이 침잠했다
멀리서 보면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삶은 때로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동지가 가까웠음인가, 숨결이 깊다
바야흐로 고삐를 다잡아야 할 때
심장의 옹이에 송진을 덧칠한다
나이테여, 내 삶의 트랙이여
한층 더 단단해지기를
♧ 바닷가에서
세상의 이목구비가 궁금한지 늘 혓바닥을 날름거립니다
해안이란 해안은 죄다 핥고 다니며 맛의 감별사를 자처합니다
이따금 벼랑을 만나면 심박수가 급격히 튀어 올라 머리를 짓찧으며 새하얗게 포효하기도 합니다
자못 비장하고 웅장한 맛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오색 무지개 비낀다는 풍문이 해안을 적시기도 합니다만 개의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염도가 달리지는 것은 아니니 일구던 염전 그대로 일구십시오
이내 잔잔해질 것입니다
저만큼 바위너설에 따개비 몇 마리 붙여놓고 흘긋흘긋 물러날 것입니다
시인이란 작자들이 원래 그렇습니다
*월간 『우리詩』 2월호(통권42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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