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담쟁이 구술 생애사 - 한희정
평화시장 가는 길목, 신의 손짓 닮았더라
시련 속에 한데 뭉치던 반세기 전 평화이야기 날줄 세우는 담쟁이처럼 목 힘줄이 불거진다 손 찔리고 잘리면서 붉은 꽃수 놓았지 한 땀 한 땀 박음질마다 밥알들 줄지었지 가난은 열다섯 살 가장을 동정하지 않더라 창이라도 있었다면 훨훨 날아갔겠지 끊기지 않는 화학사처럼 시간은 길고 길었지 쪽잠에 단꿈이 깨져도 아쉬움은 없더라 기쁨과 슬픔, 소박한 꿈도 나눠가며 그때도 지금처럼 실핏줄 터지던 밤 평등은, 공정한 세상은 감언이설에 묻히더라 불행도 행복도 시절인연, 그게 내 몫이더라
당숙도 핑그르르르 눈물샘이 터진다
그래도 늘 희망은 있지, 빈손 들고 또 뜨네
[동시] 살아가는 방법 – 김정희
화산섬 마을 숲에
새가 살았어
알을 낳으면
알이 부화할 때까지
품어주지 않아
마을사람들은 버려진 알을
화산섬 아래 땅을 파고 묻어줘
3개월이 지나서
앞에서 깨어난 새는
날아가 버리지
[시] 새의 팔만대장경 - 서안나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경판은 무르나 단단했다 나무를 바닷물과 뻘밭에 묻어 결을 달랜다고 했다 나무의 습성을 내려놓는 치목(治木)의 시간이라 했다
겨울 천수만의 새들도 부드러우나 단단했다 뻘밭에 고개를 박는 새에게서도 산벚나무 냄새가 났다 주둥이부터 꼬리까지 옹이가 없는 둥근 선을 지녔다
새가 새를 끌고 날아오르는 것은 몸 안의 팔만 사천 자를 지상에 탁본하는 순간이다 새는 뒤틀리거나 썩지 않고 벌레가 먹지 않는다 경판과 경판 틈새 바람이 잘 통하였다 서둘러 날아올라도 부딪치거나 새의 모퉁이가 상하지 않았다
팔만대장경을 읽는 데 30년이 걸린다고 했다 당신도 그러하다 물속의 젖은 부처가 손을 내밀어 내 몸의 비린 경판을 읽는 것이 한 생이라면 사랑은 여기까지다 내 것도 당신 것도 아닌 기억이 시베리아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천수만 겨울 오후 뻘밭 가득 쓰인 육필 경전 부드러우나 단단했다.
* 혜향문학회 간 『혜향문학』 2023년 하반기호(통권 21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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