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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2023 겨울호의 시(8)

by 김창집1 2024. 3. 15.

 

 

연두의 침몰 - 김성주

 

 

배가 침몰한다

 

핏방울 무늬의 흰 홑옷 걸쳐 입은 겨울손님이 오신다는 소문 파다하다

집집마다 손님맞이 불 지피느라 분주한 동백마을

그러거나 말거나 천조국의 새 하늘을 쪼개며 날아간다

 

연두가 침몰한다

극락전 투명 유리창에 부딪쳐 파닥거리는 날개

 

요금표, 구천(九泉)에서 동백마을까지 구천만 원

기억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배가 침몰한다

 

소문은 소문으로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검은 강물 따라 흘러온 주인 잃은

동백꽃, 보자기를 풀어본다

 

붉은 꽃잎

노란 꽃가루

투명 젖병

빨대 하나

빨대를 입에 문 자궁 속,

 

닻을 올린 녹두 한 알

 

 

 

 

무지개 벽돌 김순선

    - 작은 세상 그 예술의 풍경 선물 사진전(노상식의 무제를 보고)

 

 

버려진 마음들이

녹지 않은 몸 되었다

영원히 썩어지지 않는

지옥의 눈물이 여기 모여 있다

 

한때는 부러운 시선으로

아름답게 빛나던 물건들

이중삼중 알록달록 예쁘게 포장하며

무분별한 생활 속에서

너도나도 편리함 쫓던

버려진 양심들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암 덩어리 되어

이제 누울 자리 없다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바라보며

나를 존재하게 해준

이 세상을 위하여

버려진 우리 여기 모였다

누가 쓸모없는 나에게 새 생명을 심어줄 사람이 없을까

나를 발견할 새 주인을 기다리며

반성의 탑을 쌓는다

 

 

 

 

시간을 넘보다 김원욱

 

 

  문장 속에서 잠시 시간을 들여다보았네 시간이 멈춰서서 시간을 바라보는, 시원으로 향하는 푸른 시간의 말을 건네네 말은 실없이 웃기도 하고 정신 한쪽이 빈 몽달귀신처럼 빙글빙글 떠돌다가 또 다른 시간 속으로 사라지네

 

  홀로 시간을 꿈꾸는 나는 기어코 지워버렸던 시간을 탐색했네 어쩌다 만년 화석의 그림자 속으로 기어들어 갈 때 열네 살 등 뒤로 터벅터벅 걸어오던 일곱 식구와 피범벅으로 나뒹굴던 위미마을 우친내, 사랑과 이별과 한 끼 양식을 이야기하던 나는 광막한 블랙홀에서 미지의 시간을 헤아렸네 잔혹한 시간이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는 칠성의 둔덕 같은 문장에서 꿈틀거렸네

 

  시간을 비우고 나면 새로운 문장이 일어서네 나는 몇 해 전 심어놓은 동백나무 밑동에서 신들린 듯 흔들리다가 서천꽃밭 깊은 문장 속으로 사라지네 찰나처럼, 미지의 시간도 사라지네

 

 

                  *계간 제주작가2023년 겨울호(통권 제83)에서